[경상시론]본의 아니게

2023-06-14     경상일보

사과(謝過)를 법으로 규율할 수 있을까. 사람의 어떠한 행위를 법으로써 규율하기 위해서는 해당 행위의 정의와 요건 그리고 효과를 법률용어로 명시할 수 있어야 한다.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빈다’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사과를 실정법으로 규율하는 경우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상에는 사과법(謝過法, apology law)이 있다. 이 법을 처음 제정한 나라는 미국인데, 메사추세츠 주에서 1986년 시행된 ‘의료사고의 공개, 사과 및 보상 제안법(Disclosure, Apology and Offer Act, 약칭 DAO법)’이라는 법이 그것이다.

명칭에서 짐작되는 바와 같이, 사과법이 규율하는 법률관계는 일반적으로 사과 여부가 문제되는 모든 갈등상황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의료 분쟁을 그 대상으로 한다. 의료 분쟁 소송에 대한 대안으로서, 사고 시 의료진이 환자측에 하는 사과가 과실의 증거로 원용되지 않게 함으로써 의료진과 피해 환자 간 화해와 분쟁의 종국적 해결을 도모하기 위한 입법의 산물인 것이다.

이 법의 취지와 실효성에 공감한 미국 40개 주가 같은 내용의 법을 현재 가지고 있고, 캐나다, 호주, 영국 같은 영미법계 국가들과 더불어 홍콩이 실정법으로서 사과법(香港謝罪法, Apology Ordinance)을 2017년 제정해 현재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18년 김상훈 의원이 관련조항을 신설하는 방식의 환자안전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바 있으나 지금은 폐기되었다.

많은 입법례에서 사과를 법으로써 보호하려는 이유는 배상의 강제로 귀결되는 소송이 사회적 관점에서 바람직하고 궁극적인 분쟁 해결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법행위책임에 대한 소송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비용을 증가시키고, 변호사는 의뢰인에게 일정한 책임이 있는 사고가 일어났더라도 사과하지 말도록 조언하게 하며, 사과를 하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인식을 보편화시키게 된다. 그 결과 잘못을 했더라도 돈으로 갚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상식이 되고 도의적 책임을 느끼지 않는 보상문화가 만연해지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법으로까지 사과를 보호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과에는 위의 악순환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있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학교 법학과 프루 바인스 교수는 사과가 당사자들에게는 피해자를 치유하고 가해자의 판단에 균형을 회복시키며, 공동체 내에서는 옳고 그름에 대한 규범적 판단과 관계상의 책임을 강화하며 도덕적 의미를 창조하는 교육적 기능과 더불어 생물학적, 진화적 원인에 의해 발생한 공격성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음을 강조한다.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효과적인 사과(convincing apology)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갖추어야 할까. 여러 설명이 가능할 것이나 적어도 △책임의 통감 △후회의 표시 △보상의 제공 그리고 △권리 포기 등 불이익의 감수라는 의사가 담겨있다면 그 사과의 진정성은 의심받지 않을 것이다. 진정성을 의심받는 사과는 잘못을 행한 당사자가 피해자를 속이려 했다는 비난을 불러일으켜 기왕의 잘못에 피해자를 능멸한다는 과오를 더할 뿐 아니라, 당사자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해를 못하고 있다는 의심을 불러오므로 피해야 한다.

최근 부동산 개발업체인 더랜드그룹이 더팰리스73이라는 건물을 분양하면서 사용한 “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칩니다”라는 광고가 많은 비난을 받았다. 티웨이항공 역시 청주공항발 국제선을 홍보하는데 “이번 학기도 (헛)수고하셨습니다 티웨이로 떠나세요”라는 문구가 적힌 포스터를 대학 구내에 게시했다가 교체하는 일이 있었다. 두 기업 모두 의도와 달리 벌어진 일임을 밝히며 사과했다. 본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메시지를 전하는 광고는 단순히 판매 촉진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시장과 고객이 기업의 진의를 이해하게 하는 강력한 매개이다. 예견 가능한 비난을 감수하는 위험도 모자라 안 하느니만 못한 사과로 평판 훼손을 자처하는 악수(惡手)는 노이즈 마케팅도 과감한 모험도 아닌, 시장의 신뢰를 스스로 져버리는 잘못된 의사결정일 뿐이다. 이 또한 피해야 할 일이다.

이준희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