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민의 불역유행(不易流行)(2)]막걸리를 사랑하는 어느 외교관의 와인 이야기

2023-06-23     경상일보

“너는 왜 하나도 안 늙었냐?” 지난주 어느날 전철역 계단에서 들려온 정담이다. 70대 후반으로 보이는 두 친구 분들 간 얘기인데, 내 눈에는 그만큼의 연륜이 보였건만, 그 분들끼리는 아닌가보다. 순간 ‘치즈와 와인이 아니라면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Age is not important, unless you are a cheese or wine)는 영어 속담이 떠올랐다. 와인이라고 하면 몇 살짜리 나무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것인지 그리고 언제 병입되었는지 하는 빈티지가 중요하다. 포도나무는 대략 120살까지 포도주를 생산할 수 있는데, 수령 60살도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다. 한 병에 수 백만원씩 하는 보르도 5대 명주의 경우, 특히 그렇다.

유럽에서 네 번 살아 보았고 두 나라에서 공관장을 한 필자는 소믈리에 수준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몇 종류 레드와인의 맛과 향은 구분할 수 있다. 와인 애호가들이라면 부러워할 성취인데, 갈고 닦은 와인 테이스팅의 결과이다.

집 거실 한쪽에는 유럽에 살면서 마셨던 500여병의 레드와인 코르크 마개들이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25년 전, 첫 해외 근무지인 네덜란드에 부임하기 전까지만 해도 와인은 필자에게 생소했다. 비싸고 귀했던 그런 동경의 대상이 헤이그에 와서 보니, 동네 슈퍼마켓에서 쉽게, 그리고 착한 가격대에 구할 수 있었기에 마냥 신기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포르투갈에 부임하면서 포르투갈의 와인에 흠뻑 빠졌다. 와인의 역사가 프랑스에 못지않고, 보르도 지역보다 20년이나 앞선 1756년에 도우르 지역을 포도주 관리지역으로 선포해 품질을 관리해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살아본 나라 중에서 어디가 제일 좋았냐?”는 질문을 가끔 받게 될 때, 큰 주저 없이 포르투갈이라고 대답하고 방문해 볼 것을 권유하곤 한다. 사시사철 좋은 기후에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해변, 마음씨 좋은 사람들 등등 매력들이 많지만, 무엇보다도 가성비 높은 맛있는 와인들 때문이 아닐까!

그린와인이라고 있는데, 연두색깔을 띄면서 맛은 스파클링 와인과 와이트 와인의 중간쯤 된다. 여름 한낮에 냉장 보관된 그린와인 한잔, 그 첫 모금이면 세상을 다 가진 듯 즐거웠다. 한번은 친구 내외가 리스본을 방문했는데, 술을 전혀 못하는 친구 부인이 필자의 권유로 그린와인을 시음하고는 이렇게 맛있는 와인이 있냐면서 감탄했다. 사가겠다며, 가격을 물어봐서 얼버무렸는데. 막걸리 두 서너병 가격이었기에 고급와인으로 오해했을 친구부인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포르투갈에는 포르투 와인과 마데이라 와인도 유명한데, 생산 지역 명을 딴 이 와인들은 오만찬때 음식과 함께 하는 테이블 와인이 아니라, 식전후 음미하는 알콜 도수 20도의 달콤한 와인이다. 포르투 와인은 영불간 백년전쟁의 산물이다. 전쟁으로 프랑스산 와인을 수입하기 어려워진 영국 상인들이 포르투 지역 레드와인을 사서 영국으로 운송하는 도중 변질되는 경우가 속출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도수가 높은 영국산 브랜디를 첨가해 만든 것이다. 와인의 발효를 인위적으로 중단시켰기에 도수와 당도가 높으면서 오랫동안 보관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런 역사적 배경으로, 영국왕실 주관행사에서 포르투 와인이 식후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포르투갈 와인마켓에서 50~60년 된 포르투 와인을 쉽게 구할 수 있고, 필자도 ‘불혹’ 나이의 와인을 마신 적이 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생일 또는 결혼을 기념해 그 해 생산된 포르투와인을 사두었다가 수 십년을 기다린 후 가족들과 함께 나눠 마시는 이벤트를 즐겨한다.

마데이라 와인은 포르투 와인과 같은 강화 와인이지만, 대서양 서쪽에 위치한 마데이라 섬에서 만들어졌고, 영국인들이 아닌 미국인들이 즐긴다는 점에서 다르다. 1776년 토마스 재퍼슨과 밴자민 프랭클린이 독립선언서 작성을 막 끝낸 직후, 함께 자리했던 다른 독립투사들과 함께한 건배주였다고 한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했던 미국인들로서는 영국인들이 만든 포르투 와인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포르투갈 산 테이블 와인은 200여종이 넘는 다양한 포도 품종으로 만드는데, 프랑스처럼 여러 품종을 블랜딩하기도 하지만, 단일 포도품종으로 만든 와인도 쉽게 그리고 싸게 구할 수 있다. 카베르네 쇼비뇽, 카베르네 프랑, 메를로, 시라, 가메 등 해외 품종은 물론, 투리가 나시오날, 투리가 프란카, 아라고네즈, 바가 등 토착 품종으로만 만들어진 레드와인의 풍미는 과히 놀랄만하다.

그런데, 헝가리에 가보니, 그들의 생각은 달랐다. 헝가리 사람들은 그들의 와인 역사가 포르투갈보다 앞서있다며, 1737년 포고된 관련 칙령을 언급하면서 구소련 공산정권에서 와인 생산지가 황폐화되기 이전까지는 유럽내 최고의 생산지였다고 자랑한다.

솔직히, 헝가리 동북부에 위치하면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와인산지인 토카이 지역 와인이 세계 최고의 스위트 와인이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스위트 와인에는 포르투 와인과 같은 강화 와인,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 캐나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아이스 와인 그리고 곰팡이 균으로 귀하게 부패했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귀부 와인이 있는데, 귀부 와인 중에서도 토카이 와인은 단연 최고다.

7년 전 외교부 유럽국장을 마치고 포르투갈로 부임 전, 20여명의 주한 유럽대사들이 환송파티를 베풀어 주었다. 각국 대사들이 자국 생산 와인들을 한 두병씩 가져와서 나눠 마셨는데, 모두들 자기 술이 최고라면서 너스레를 떨던 그 때도 그리고 지금도 필자에게는 한국산 생 막걸리가 최고다. 그래서, 필자가 주최하는 행사의 건배주는 포르투갈에서도, 헝가리에서도 그리고 이곳 울산에서도 항상 막걸리다.

박철민 울산시 국제관계대사 전 헝가리·포르투갈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