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때 왜군 집단탈영 울산에 50여명 귀화

2023-07-17     전상헌 기자
김문길

울산현을 중심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왔던 왜군이 집단 탈영을 감행해 조선 사람이 된 ‘강왜’(降倭) 숫자가 상당수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김문길 부산한일문화연구소 소장은 16일 강왜한 왜군이 조선 각 현에 거주한 동향을 조사한 임란 후 최초의 호적을 조사한 결과 울산에 50여명이 귀화해 거주했다고 밝혔다.

왜군의 집단 탈영 기록은 1609년(만역 37년)으로 규슈지역 장군인 샤야가(沙也可)가 김해김씨 족보를 얻어 대구 우록촌(友鹿村)에 집단을 이뤄 산다는 기록만 있었다.

하지만, 강왜 기록으로 만든 귀화인 울산 최초의 호적이라 할 수 있는 <만력사유>를 보면 총 56장에 걸쳐 귀화자와 후손 등 50여명이 울산을 중심으로 인근 언양, 양산 등지에서 거주한 것으로 파악됐다.

김문길

특히 <만력사유>에는 임진왜란 당시 강왜해 군관과 의병으로 조선측에서 일본과 싸워 공을 세운 서생성 창표당 공신의 이름도 확인할 수 있다. 또 조선으로 귀화했지만, 다수가 도자기를 굽거나 석축을 쌓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기에 다시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는 기록도 남았다.

또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등이 공을 세우고 향화(向化)한 구체적인 기록도 있다. 대표적 인물은 서생성에서 명나라군을 지휘해 공을 세워 창표당을 세운 마제독이다.

이런 강왜 기록문은 고 이유수 울산 향토사학자가 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원본을 발견해 김 소장의 연구를 위해 전해주며 최근 확인됐다.

앞서 김 소장은 왜군의 집단 탈영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진주한 왜군들의 탈영을 막기 위해 각 주둔지에 보낸 주인장(朱仁壯)을 일본 오사카성 자료목록에서 발견해 공개한 바 있다.

주인장은 임란 당시 일본의 최고 통치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각 군사령관 등에게 보낸 명령서 등의 서류다. 이것이 없으면 엄벌에 처해지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왜군의 군수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조선의 문물을 체험한 왜군이 탈영을 감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김 소장은 “도주하는 왜군은 농민 출신이 대부분이었지만, 장군 등 고위층도 상당수 있었고, 양반가 딸 등과 결혼 기록도 있다”며 “호적에 나타난 공신자 명단, 사망자 수 등만 조사하면 당시 조선의 문명에 감명해 탈영한 왜군의 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상헌기자 honey@ks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