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오은 ‘그곳’

2023-07-31     전상헌 기자

거울이 말한다.
보이는 것을 다 믿지는 마라.

형광등이 말한다.
말귀가 어두울수록 글눈이 밝은 법이다.

두루마리 화장지가 말한다.
술술 풀릴 때를 조심하라.

수도꼭지가 말한다.
물 쓰듯 쓰다가 물 건너간다.

치약이 말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변기가 말한다.

끝났다고 생각한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라.



화장실 사물의 입 빌려 촌철살인 금언 쏟아내

제목은 ‘그곳’인데 장소를 지칭하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거울, 휴지, 변기 같은 사물을 통해 그곳이 화장실임을 짐작할 수 있다. 화장실에서 사물들은 자신의 속성과 연관된 어떤 경구나 잠언을 들려준다.

이런 사물들의 말은 바로 화장실의 낙서와 같다. 예로부터 화장실은 생리적인 일뿐 아니라 감정을 배설하는 공간이다. 야릇한 그림부터 자기류의 격언, 정치적 구호까지, 화장실 벽은 대나무숲의 역할을 했다. 이제 화장실 벽은 타일로 둘러쳐지면서 낙서판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래서 시인은 화장실에 비치된 사물의 입을 빌어 촌철살인의 금언을 쏟아낸다. 왕년의 낙서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물 쓰듯 쓰다가 물 건너간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는 인터넷에서 회자할 법한, 언어유희가 가미된 경구이다. 소위 MZ 세대의 ‘갬성’이 묻어나는, 충고인 듯 충고 아닌 충고라고나 할까.

치약의 말은 왜 나왔을까. 다 쓴 것 같지만 눌러 짜면 몇 번 더 나오기 때문? 변기의 경우는 상상에 맡기고, 한 줄 더 추가해보자. 수건이 말한다/삶는다고 삶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다. 삶다 보면 삶이 나아지기도 한다.

송은숙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