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강]전세제도의 명과 암

2023-07-31     경상일보

얼마전 ‘무자본 갭투자’의 조직적 전세사기범인 속칭 ‘빌라왕’의 빌라에 전세 살다가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안타까운 사건들이 보도됐다. 금리 상승과 부동산 가격 하락 등의 상황에서 빚어진 일이다. 확정일자에 의한 대항력이나 소액보증금의 최우선변제권 등 보호장치가 있지만 분양시의 은행대출금에 선순위 담보권이 있거나 당해세 등 부담이 있는 경우 피해가 생긴다. 경험없는 무주택 서민들을 벼랑끝으로 내모는 전세제도가 이제 수명을 다했다는 말도 나왔다. 국회에서 부랴부랴 전세사기 피해자에게 경·공매에서 우선매수권을 주거나 경·공매 중지 등을 할 수 있게 하고 필요한 자금을 융자해 주는 등의 피해자 보호에 관한 특별법이 만들어졌다.

수년전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를 때 빌라 수십채를 갭투자 방식으로 매수해 전세놓았다가 최근에 사기죄로 구속된 지인 아들의 사건을 변론하다 보니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동산컨설팅업체와 중개사사무실 등에서 하는 ‘가격이 오르니 전세보증금에 조금 돈을 보태 대금을 지급하고 매수하면 전매해 차익을 남길 수 있고, 임차인 물색과 전매 등의 관리도 해 주겠다’는 말에 현혹돼 투자가치가 있다고 보고 소유 빌라를 늘렸다. 코인 등 온갖 투기성 투자가 횡행하는 것이 현실이지 않는가. 금리가 오르고 주택 가격이 떨어지면서 전세 가격도 덩달아 떨어졌고, 부과된 세금을 꾸준히 납부했지만 전세기간이 만료돼 전세금 반환에 차질이 생기자 새로운 세입자를 물색하고 심지어 처가와 친가에 손을 벌려 마련한 돈까지 보태 전세금을 내주는 등 안간힘을 썼으나 역부족이었다. ‘빌라왕’과 양태가 달랐지만 ‘전세금의 반환 의사와 능력이 없었다’는 사기죄의 구성요건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보증에 의한 전세금 대출도 있어 피해는 HUG로도 전가될 것이다.

전세제도는 전세금을 지급하고 타인의 부동산을 용도에 좇아 사용 수익하는 용익물권으로 한국에만 있는 제도다. 부동산을 사용 수익하는 것이 주된 기능이지만 집주인의 입장에서는 주택을 담보로 이자부 소비대차를 하는 셈이어서 부동산 담보의 기능이 있다. 전세권은 등기를 하는 물권으로 경매청구권과 우선변제권이 있어 단순히 임대보증금을 지급하고 부동산을 이용하는 임대차나 채권적 전세와는 차이가 있다.

전세는 전세금(또는 보증금) 미반환의 위험이 항상 잠재해 있다. 필자도 결혼 초기 전셋집에서 살 때 집주인이 1년만에 전세금을 너무 많이 올려 매달 급여의 저축으로는 벅차 무척 당황스러웠는데 이렇게 전세금을 올려받은 집주인은 전세기간이 끝나자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오면 전세금을 받아서 내주겠다’고 해 이사가 늦어졌던 기억이 있다. 엄밀히 따진다면 법적으로는 기간 만료시 새로운 세입자와 무관하게 전세금을 내줘야 한다. 요즈음과 같이 주택 가격의 하락으로 인해 전세금이 집값보다 높아지는 역전세현상이 생기거나 주택담보 대출금과 세입자의 전세금을 합한 금액이 집값의 80%정도를 넘는 속칭 ‘깡통전세’가 되고, 경매라도 진행되면 전세입자는 전세금을 받기가 어려워진다.

전세가 후진적 사금융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처음에 월세, 다음에 보증금부 임대차나 전세, 이후 돈을 모아 매수로서 자가(自家)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해 왔다. 작년말 현재 전세보증금 총액이 1058조원에 이른다는 통계 조사도 있으니 전세제도의 명암에도 불구하고 수명을 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안으로서 월세는 목돈없이 월수입이 안정적이면 선호할 수 있지만 시중 금리를 볼 때 전세보다 세입자에게 별로 유리하지 않다. 전세금 대출이 서민의 주거 지원을 넘어 ‘무자본 갭투자’의 수단으로 악용되는 현실은 답답한 일이다. 주거 복지의 대상이 아님에도 저율의 전세금 대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세 계약시 임대인 관련 정보를 철저히 확인하고 등기 등을 제대로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박기준 변호사 제55대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