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철호의 反求諸己(69)]교사의 죽음, 학생은 약자인가?
연이은 교사의 죽음, 가슴이 아프다. 그들은 왜 목숨이라는 가장 소중한 것을 스스로 버렸을까?
학생은 약자인가? 한때 학생이 약자로 인식되었던 때가 있었다. 세상은 앞다투어 약자인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학생인권조례, 체벌 금지, 아동학대법 등 학생의 인권 수준을 높이는 법과 제도를 만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학생들에게 붙여준 권익은 그들의 인권을 보호하게도 했지만, 일부는 권리가 돼 그 권리를 행사하게 했다. 때마침 학생의 권익에 학부모라는 비장의 무기가 더해지면서 일부 학생은 약자가 아닌 강자로 발돋움하기에 이르렀다.
학생이 약자라면 교사는 강자인가? 한때 교사가 학생에 반해 상대적으로 강자로 인식되었던 때가 있다. 그랬기에 아동학대법 등에서 교사를 잠재적 가해자로 간주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약자로 인식되었던 학생의 인권은 나날이 높아졌지만, 상대적으로 강자로 인식되었던 교사에 대한 인권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쪽이 높아지는 만큼 한쪽은 낮아졌다.
지금 현재 학생은 약자가 아니다. 교사도 강자가 아니다. 그런데 학생의 인권을 보호하고 강화하는 법과 제도는 많은 데 반해 교사의 인권과 권익을 보호하는 법과 제도는 거의 없다. 물론 학생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과 제도는 꼭 필요하다. 문제는 학생과 학부모의 부당한 횡포에 견디지 못한 교사들이 목숨을 끊는 일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교사의 인권을 보호하고 교사로서 자존감을 지닌 채 올바른 교사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교권을 법령으로 보장해야 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굽으면 온전할 수 있고, 구부리면 곧게 펼 수 있으며, 움푹하면 채울 수 있고, 낡으면 새로워질 수 있다(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廢則新).”라고 했다. ‘움푹하다’와 ‘차다’는 말은 서로 상대적이다. 그런데 ‘차다’는 ‘움푹하다’라는 것이 있어야 존재하며, ‘움푹하다’라는 것은 ‘차다’가 있어야 존재한다. 개별적 관점에서 보면 ‘나’와 ‘남’은 별개이지만, 도의 관점에서 보면 서로 다르지 않다. 강은 곧게 흐르기도 하고 굽게 흐르기도 하지만,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흘러 결국은 바다에 이른다는 점은 같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도 그렇다. 상대가 있어야 내가 있는 것이니 서로 하나 돼 올바른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송철호 인문고전평론가·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