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김사인 ‘가을날’

2023-10-23     전상헌 기자

좋지 가을볕은
뽀뿌링 호청같이 깔깔하지

가을볕은 차
젊은 나이에 혼자된
재종숙모 같지
허전하고 한가하지

빈들 너머
버스는 달려가고
물방개처럼

추수 끝난 나락 대궁을
나는 뽁뽁 눌러 밟았네
피는 먼지구름 위로
하늘빛은 고요
돌이킬 수 없었네
아무도 오지 않던 가을날



“삶의 고독과 마주해야 하는 시인의 숙명”

포플린 홑청이 아니고 ‘뽀뿌링 호청’이라니, 유년을 생각나게 하는 이 다정하고 따뜻한 말.

그러니까 어떤 풍경을 떠올려 보자. 바지랑대 높이 세운 빨랫줄에 하얀 이불 홑청이 내걸린 가을 오후를. 금이 갈 듯 파란 하늘에 흰 구름 두엇 떠 있고, 가을볕은 맑고 투명해서 만지면 ‘깔깔’한 느낌이 들 것 같고. 추수 끝난 뒤 부모님은 장이나 마실을 가셔서 혼자 마루에 앉아있으려니 사위는 고요하고 한적하고 문득 쓸쓸해서, 목을 늘이고 대문 밖을 보면 멀리 빈들로 버스가 지나가고, 아, 저 버스를 타고 어디 먼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결국 몸을 일으켜 간 곳이 나락을 베어낸 논, 빈 논처럼 텅 빈 하늘, 그 아득한 풍경들을.

벼 그루터기를 눌러 밟은 것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외롭고 허기진 마음을 진정시키는 행동일 터이고. ‘돌이킬 수 없었’다니, 무엇을 돌이킬 수 없었다는 말일까. 아마 화자는 ‘아무도 오지 않던 가을날’ 그 쓸쓸하고 허전한 날, 문득 시인이 되리라는 걸 예감했던 것은 아닐까. 가을날처럼 삶의 고독과 마주해야 하는 시인의 숙명을 돌이킬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리라는 것을.

송은숙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