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깨달음이 망각이 되지 않도록

2023-12-20     경상일보

그림을 그리기 전 매해가 새로이 시작되면 꼭 읽는 책이 있다. E.H 곰브리치(Ernst Hans Josef Gombrich)의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이다. 매년 읽었으니 적어도 15번은 읽었을 것 같다. 때로는 영문판으로 때로는 번역판으로.

나에게 이 책은 정보 서적이기보다는 자기 계발서에 가깝다. 항상 이 책을 중심으로 한 해를 계획하고, 궤도를 수정해서 한 해를 마감한다. 나에게 이 책이 끊임없이 들려주는 말은 ‘깨어라’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벗어난 생각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 구조주의란 틀 안에 갇혀 있어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그 생각조차 이 시대에서 나오는 발상일 뿐이다. 예를 들어 중세의 천년을 생각해 보자. 천 년 동안이나 하나님이 존재하고 천사가 존재한다고 믿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살아왔다. 하나님이 보고 있으니, 하나님의 계율을 지켜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내려오기에 천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물론 아직도 그 영향이 있다.) 하늘만 보던 시선을 거두고 인간의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보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이 우리가 알고 있던 위대한 화가들이다.

인간이 그리기 편하도록 고안된 한 눈으로 보는 원근법을 깨트리고, 두 눈을 이용해 진짜 인간의 눈으로 보는 방식으로 보기까지 또 많은 시간이 흘렀다.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잔이 그랬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시간이 상대적임을 알았던 피카소는 한 물체를 입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속도가 빠를수록 거리감이 제로에 가깝다는 걸 보여 준 셈이다. 이제는 과연 우리가 보는 것이 진실일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도 나중에 시력을 회복하게 되면 보는 것을 배워야 한다. 약간의 자기 훈련과 자기 관찰을 통해 소위 본다는 것이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또는 믿음)에 의해 형상이 잡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인습적인’ 선이나 형태를 사용해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우리 내부에 있는 ‘이집트인’은 억눌려 있을지는 모르나 결코 완전히 패배한 것은 아니다.

미술의 역사는 끊임없는 시험과 수많은 재능 있는 미술가들이 이 인습의 틀을 깨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듯이 그도 거인의 어깨 위에 앉아 있었다고 했다. 그 위대한 화가들의 노력이 또 다른 후대 화가들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의 생각을 이끌어왔다, 그렇다고 이를 진보라 하진 않는다. 단지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는 이야기다. 세상은 무서운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안의 틀을 깨고, 생각을 열린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이 책에 대한 나의 존경을 표하기 위해 그림을 시작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무수히 많은 생각을 그림으로 내 앞에 꺼내놓고 싶었다. 처음에는 테두리라는 선(線)에 묶여서 그 안에 우리가 아는 색을 집어넣었다(동그라미 안에 빨간색-사과). 그렇게 ‘이집트인 (정형화, 고정, 인습, 기존 등)’을 부활시켰을 뿐이었다. 얼마만큼을 해야 그 선(線)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착잡하기만 했다. 3년이 될 즈음 눈을 감고 죽기 살기로 달려드니 어느 정도 선(線)을 벗어났다. 그 다음에는 형(形)도 의미가 없었고, 색(色)도 의미가 없었다. 보이는 모든 것이 결국 내 관념과 기존의 믿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정확히 아직도 깨달아 가고 있는 중이다.

새해를 준비하며 버킷 리스트 중 또 다른 하나는 위대한 화가들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린다고 모두 위대한 화가가 되지는 않는다. 위대한 화가는 그 시대를 정확히 읽어 내야 하고 또한 그 시대를 뛰어넘어 다음 시대를 위한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서, 미술사 전공자로서 다양한 각도로 왜 그들이 그 위치에 있는지 조금의 깨달음이 망각이 되지 않도록 글로 남기고자 한다. 급격히 변화하는 세상에서 새로운 한 해에 걸맞은 새로움으로.

장훈화 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