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인공지능과 미술: 위기인가 기회인가
2022년 12월 뉴욕에서 인공지능을 전공하는 뉴욕대 데이터 사이언스 대학원생 몇 명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마침 정재승 교수가 이끄는 카이스트와 뉴욕대가 맨해튼에 공동 캠퍼스를 9월에 설립했기에 그들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 관심사는 온통 ‘Chat GPT 3.5’란 것에 쏠려 있었다. 그들은 Chat GPT 3.5의 작동 원리에 경의를 표했다. ‘강화학습’이 들어가서 이전 버전과는 차원이 다르다며 열광했다. 난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적어보았다. 반은 맞고 반은 엉터리 정보였다. 세상이 바뀔 거라는 성급한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관한 예측도 보였다. 나에게는 너무 먼 미래였다.
2023년 지난 1년 동안 Chat GPT(특히 Chat GPT 4)는 무서운 속도로 정확성을 갖추어 가고 있다. 최근에는 보이스 기능도 첨가되어 영어 회화 연습도 가능하고, 심지어 동시통역도 몇 가지 단점이 있지만 실제로 내가 사용하기에 불편함이 없다. 마치 나의 옆을 따라다니는 비서를 둔 듯 친근한 느낌마저 든다. 이제까지 나에게 인공지능은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의 머나먼 이야기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짧은 시간 안에 일반인이 사용하기는 힘들 거라는 나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단 1년 걸렸다.
Chat GPT는 텍스트(보이스, 텍스트)로의 입력이기에 우리가 말하는 대로 그대로 생성되어서 너무나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현재는 단지 텍스트로(또는 음성으로) 몇 초 만에 이미지 생성까지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은 화가인 나로서는 상당히 위기감을 느끼는 부분이다. 이제 인공지능이 생성한 이미지가 예술가의 창의성을 대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단순히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반복 작업을 위한 도구로써의 역할에서 그칠까? 인공지능의 기술은 날로 발전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예술의 가치는 무엇이고,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일까라는 근본적인 고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공지능의 시대를 맞이하며 예술가로서의 고민을 하다보니, 미술은 예전에도 항상 시대의 기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예로 15세기 구텐베르크 인쇄술의 발전은 판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다색 인쇄 기술의 발전은 초기의 흑백 판화에 여러 색상을 사용해 좀 더 판화 작품에 풍부한 감정과 생동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는 판화의 상업적 가치를 높이고 판화 작품의 시장성을 항상 시키는 결과까지 낳았다.
또한 19세기 산업혁명과 더불어 과학적 발견은 화가들에게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주었다. 특히 사진기의 등장은 더 이상 사물을 똑같이 그린다는 데 별 의미를 두지 않게 되었다. 전통적인 회화 양식인 재현(再現)을 목적으로 하는 화가들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이런 기술의 발전은 몇몇 화가들에게는 커다란 기회로 다가왔고, 결국 그들을 위대한 화가의 대열에 합류하게 했다. 기차가 말을 대신함으로써 예전보다 빠른 속도감을 체득한 화가들은 더 이상 재현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들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그들이 느낀 ‘인상’을 그렸다. 광학 기술의 발달은 그들을 더 이상 어두운 회색 그림자의 그늘이 아닌 풍요로운 색의 그늘 안으로 이끌었다. 들고 다니기 편한 물감 튜브의 등장은 화가들을 야외로 시선을 돌리게 했다. 이렇게 탄생한 이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네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이다. 인상주의 회화가 여전히 보는 것을 그린다는 한계성에 머물고는 있지만, 그들은 진실로 우리에게 보는 법을 새롭게 했다. 미래의 방향성은 어려움 속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즉 위기를 기회로 삼은 이들의 예술적 고민과 노력에서 나온다.
최근 라스베가스에서 CES 2024가 열렸다. CES의 핵심 키워드는 누가 뭐래도 인공지능(AI)이었다. 세계는 빠른 속도로 예전에 없던 변화를 겪고 있다. 동시에 예술가도 도전과 기회를 같이 가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예술가의 가치에 대한 불안감과 더불어 새로운 형태와 아이디어를 탐구할 기회이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이는 우리에게 예전에 없던, 예술의 미래에 대한 흥미로운 담론을 열어줄 것이라 나는 믿는다.
장훈화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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