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속의 꽃(6) 살구꽃]봄밤 이별의 끝자락

2024-04-23     경상일보

언제부터가 봄일까?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내게는 밤이 춥지 않아 설레기 시작할 때부터다. 그렇다면 봄의 절정은 언제일까? 살구꽃이 한창일 때다. 한식과 청명 시절 핀다는 살구꽃은, 울산에서는 3월 말에 핀다.

꽃 모양은 매화나 벚꽃과 비슷하지만, 매화가 질 때 살구꽃이 피고 살구꽃이 질 때 벚꽃이 핀다. 벚꽃까지 다 진 마당에 살구꽃 이야기를 하자니 머쓱하지만, 울산과 인연 깊은 시인의 살구꽃 시 한 편 읽는 것으로 봄의 끝자락을 잘 매듭짓기로 한다.



오경의 등불 그림자 지워진 화장 비추는데
이별을 말하려 하니 애가 먼저 끊어지네.
마당 반쯤 지는 달빛에 문을 밀고 나서는데
살구꽃 성근 그림자 옷에 가득하네.

五更燈影照殘粧(오경등영조잔장)
欲語別離先斷腸(욕어별리선단장)
落月半庭推戶出(낙월반정추호출)
杏花疎影滿衣裳(행화소영만의상)

고려 시인 정포(1309~1345)의 ‘양주 객사 벽에 쓰다(題梁州客舍壁)’라는 시다. 양주는 양산의 옛 이름이다. 원나라가 고려 내정을 간섭할 때 정포는 원나라로 망명하려 한다는 참소를 입고 울주군수로 좌천된다. 이 시는 그때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경은 새벽 3시부터 5시 사이다. 이별을 앞둔 두 사람은 새벽 어스름 일렁이는 등불을 사이에 두고 있다. 질끈 이별을 고하고 나선 객사 앞마당엔 달빛이 절반쯤 들이치고, 마당을 지나 문을 나서려 할 때 살구꽃 성근 그림자가 시인 옷에 한가득이라 했다. ‘성근’ 그림자가 어떻게 옷에 ‘가득’할 수 있을까? 객사에 남겨진 여인의 ‘성근’ 꽃떨기 같은 손이, 떠나가는 시인의 옷자락을 ‘한가득’ 붙잡았기 때문 아니었을까.

안순태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알고 보면 반할 꽃시>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