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분옥 시조시인의 시조 美學과 절제](16)철령 높은 봉을 - 이항복(1556~1618)
철령 높은 봉을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를 비 삼아 띄어다가
임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 본들 어떠리
“전해지지 못한 충정의 비통함”
햇빛을 영원히 가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잠시 구름이 가릴 뿐이다. 지금 이 시대, 안개 낀 정치국면을 걷어내는 충정의 직언이 필요함이 간절하다.
백사 이항복은 입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다섯 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로 난을 지휘하며 군을 정비했던 충신이다. 임란 때 조정을 선조 임금과 세자 광해군은 국정을 분조(分朝)해서 운영했다. 그때 백사 이항복은 세자 광해군을 받들며 왜의 유린에서 국토를 지켜가며 광해군과 동고동락한 적이 있다. 또한 임란 3대첩 중 행주대첩을 이끌어 낸 권율장군의 사위로서 역할을 다한 백사 이항복이었다.
41세에 영의정에 올라 선조를 의주까지 호송했으며 명나라에 원병을 청했다.
영창대군 사사와 인목대비 폐비 이후면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 모시던 임금도 무사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인목대비 폐비론을 극력 반대했다. 그러나 임금 광해군은 충신의 직언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을 떠나게 되니 충신의 심정이 어떠하였겠나.
이 시조는 함경도 북청(北靑)으로 가는 유배 길에 강원도 철령 높은 봉을 넘어가며 읊었다.
겹겹 깊은 심처에 당쟁의 반대 정파에 둘러싸인 임금께 전해지지 못하는 충정, 그 안타까움이 진하게 느껴진다.
높은 봉우리를 쉬어 넘는 구름을 불러 외로운 신하의 비통함을 비가 되어서라도 전하고픈 충신의 눈물로 쓴 시조이다.
뒤에 광해군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지만, 권신들 때문에 불러오지 못했다. 만고충신 백사는 끝내 외면당하고 북청, 귀양처에서 해배되지 못한 채 늙은 신하는 돌아가고 말았다.
광해군은 조선의 제15대 왕으로 임진왜란 이후 부국강병의 기틀을 다졌지만 인조반정에 폐위되고 말았다. 결국 충신의 직언을 받아들이지 못한 신하의 눈물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후대인들에게 잘 보여주는 시조이다. 올바른 정국을 이끌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목숨을 걸고 직언하는 충신이 지금 이 시대에도 절실하다. 한분옥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