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기억’에 대한 단상
누구나 기억을 만나는 지점은 바로 지금이며 그것도 현실과 직면하여 새롭게 재구성된 기억이라고 한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현실과 과거에 대한 어떤 ‘각성’을 얻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기존의 기억 이미지를 고집스레 붙잡고 있다면 인식과 실천의 질적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기억과 변혁 혹은 구원을 역사의 문맥에서 캐내려는 태도가 중요한 까닭이다.
민선 8기가 ‘위대한 울산’을 다시 만들자며 출범한 지 2년을 앞두고 있다. ‘새로 만드는 위대한 울산, 울산을 다시 울산답게’라는 목표가 거의 50% 수준에 도달했다고 하니 다행이다. 다만 산업과 에너지 관련 성과 뉴스는 많고, 청소년 교육 관광 관련 소식은 비교적 적어 걱정도 된다. 무엇보다 국립대학 유치와 ‘세계적 공연장’ 건설은 시민적 관심이 워낙 큰 만큼 신중한 점검이 필요해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울산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아 울산의 정체성과 미래 전략에 관한 여러 의견을 들어왔다. ‘울산답게’라는 구호를 처음 들었을 때, 한편으로는 설레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의아하기도 했었다. 무슨 의미인지 잘 와 닫지 않아서다. 무엇이 ‘울산다운’ 것이며, 무엇이 ‘위대한’ 것인지? 정말 그렇게 규정할만한 것이 있기는 한지?
물론 특정한 경험을 한 사람은 색다른 방식으로 과거를 회상할 수 있다. 하지만 정체성은 이미 확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형성과정에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만약 외부인이 울산다운 ‘정신’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막연하다. 울산이 조국 근대화 과정에서 산업수도로 불릴 정도로 중추적 역할을 한 사실은 국민이 안다. 공해 도시라는 부끄러운 수식어가 따라붙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1962년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 울산인의 역사와 삶은 울산다움을 형성하는데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할지, 앞으로 울산은 과거의 경험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미래를 꿈꿀 수 있을지, ‘울산다운 위대한 울산’은 울산의 역사에서 어느 특정 시기에만 한정되는지, 아니면 전체 시기를 포함하는지, 어느 쪽이든 그 판단은 타당한지? 궁금하다.
산업도시라면 으레 그렇듯이 울산도 도시형성 과정에서 발전과 성장이라는 밝은 측면과 공동체 해체와 억압이라는 어두운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든 밝은 면은 크게 조명받았고, 어두운 면은 애써 감춰지거나 무시되었다. 역내 주민이주의 고통과 공해 문제는 어두운 측면의 한 현상에 불과하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울산의 기형적 도시발전은 무엇보다 국가가 지역을 어떻게 수탈하고 강제했는지, 그러면서도 보상적 차원의 지원은 어느 정도 소홀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산업수도와 부자 도시라는 그럴싸한 치장 말고는.
부자 도시 울산이란 실은 ‘허상’이며 여전히 ‘일만 하는’ 도시라는 주장이 더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통계 지표로 볼 때, 부동의 1위인 1인당 지역 총생산을 제외하면 내세울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지역 총생산은 전국 9위이며, 1인당 개인소득은 2356만 원으로 서울에 이어 2위지만 전국 평균 2120만 원과 별반 차이가 없다. 특히 가계 총소비 역외 순 유출은 무려 50%로 전국 1위다. 그동안 국가가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수탈자였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운 수치다. 더구나 오늘날 부자 도시란 소득 수준만이 아니라 환경, 교육, 복지, 문화예술, 그리고 시민의 가치관과 태도의 품격 등으로 평가된다는 점에서 울산시민이 느끼는 박탈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삶 속에서 겪고 생각하고 욕망한 모든 기억은 과거와 현실을 이해하는 자료가 된다. 상투적 이념과 권력이 강제한 오염된 기억 또한 마찬가지다. ‘기억의 창고 열어주기’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역사적 문맥에서 각성과 변혁과 구원으로 인도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과거의 기억들을 소환하여 창조적으로 재구성하는 차가운 열정을, 울산시민의 개인적 사회적 품성으로 공유하고 확장하길 바란다. 그것이 ‘현실적’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기본 전제이기 때문이다.
김정배 전 울산문화재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