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GPU칩, 시대의 황금이 되다

2024-06-03     경상일보

기업이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수단 가운데, 보유자산, 재고자산 또는 매출 채권 등을 담보로 실행되는 자산유동화대출 또는 자산담보부대출이 있다. ABL(Asset-Backed Lending)이라고도 부르는 자산유동화대출은, 무엇을 대출 실행의 기초자산(borrowing base)으로 할 것인가를 정할 때 해당 기업이 속해있는 산업의 특성이 반영되는데, 석유 및 가스 산업 상류부문 기업들이 자사가 보유한 유전이나 가스전에 매장된 석유, 가스 자산을 담보로 대출이 실행되는 RBL(Reserve Based Lending)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참고로 RBL은 미국과 영국에 이중 상장된 미국 기업 코스모스 에너지(Kosmos Energy)가 지난 4월 13억5000달러를 조달한 경우와 같이 해외에서는 사례가 드물지 않으나, 국내 기업이 실행한 이력은 없다.

그런데 최근 ABL 시장에서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유형의 자산에 대한 담보부 대출 거래가 무려 75억달러 규모로 이루어졌다. 미국의 스타트업 기업인 코어위브(CoreWeave)가 운용자산 기준 세계 최대 사모펀드인 블랙스톤으로부터 받은 신용공여(debt financing facility)가 그것이다. 아무리 모험적인 투자를 마다않는 사모펀드라지만 스타트업 기업에 한화로 10조원이 넘는 금액을 신용만으로 빌려줄 리는 만무하다. 당연히 대주들을 설득할 수 있는 담보가 제공되었는데, 대출 거래상 담보물로 잡은 차주의 자산이 독특하다. 코어위브는 데이터 센터에서 인공지능 컴퓨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GPU 클라우드 회사인데, 이 사업을 위해 코어위브가 보유한 엔비디아의 GPU칩이 이번 대출을 가능하게 한 담보 자산이었다.

공표된 거래구조에 따르면, 최신 모델의 경우 개당 4만달러에 달한다는 GPU칩을 통해 코어위브가 벌어들인 수익은 일차적으로 대주들에게 돌아가며, 원리금 상환 후 남은 수익분이 차주 회사로 귀속된다. 조달 금리는 낮지 않다. 하단이 연 10%가 넘는 조건인데, 대주들이 시장에서 업력(業力)으로 검증되지 않은 기업의 상환능력을 아직은 확신하지 못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례가 없는 규모와 구조의 대출에 투자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참여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전 세계 산업 전반을 뒤흔들고 있는 AI 붐과 그 상승세가 모든 예측을 뛰어넘는 속도로 진행되는 인공지능 컴퓨팅 서비스에 대한 수요 속에 들어있다. 올해 시장이 예상하는 코어위브의 수익은 EBITDA(이자비용, 세금, 감가상각비, 무형자산상각비 차감 전 이익) 기준 50억달러 규모이다. 수익의 원천은 데이터 센터이며, 데이터 센터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AI 칩이 필요하다. 아마존이나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빅 테크 기업들부터 코어위브와 같은 스타트업 기업들, 그리고 인공지능 역량이 국익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깨달아 AI 주권 수호에 필요한 소버린 AI를 구축하려고 하는 각국 정부들 모두가 AI 칩의 수요를 폭발시키고 있다. 투자자들은 거래에 내재한 그 모든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AI 붐이 가져온 이 매력적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의 중심에 인공지능의 구동을 가능하게 하는 GPU칩이 있다.

투자의 대상이 되는 자산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 왔다. 전통 자산인 금융과 부동산을 비롯해 태양광 전력, 명품, 예술작품 등 대체자산은 그 범위를 계속 확대해 나가고 있다. 과거에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암호화폐는 미국을 비롯한 각국 금융당국의 승인을 거쳐 거래소에 상장되는 금융상품의 기초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컴퓨터에 들어가는 반도체 부품 정도로 막연히 알고 있던 GPU칩이 막대한 현금을 창출해 내는 자산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시대의 가치를 상징하는 황금이 된 것이다.

시장이 선호하는 절대불변의 가치란 없다. 가치의 이동이 만들어 내는 변화를, 누군가는 기회로 해석해 도전하고 성과를 이끌어내는 반면, 누군가는 의심하고 도전하는 이들을 비난하는 자리에 선다. 신중함의 미덕으로 확정된 미래를 유예하거나 임박한 유효기간을 연장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이준희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