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붉은 도끼[13]] 2부. 버드나무숲 (6) - 글 : 김태환
중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운 나는 마츠오와 소통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마츠오는 나의 일본어 발음이 본토사람과 구분이 안 될 정도라며 좋아했다. 공교롭게도 마츠오와 나는 같은 동갑내기였다. 그는 식민지에 근무하면서도 조선사람들에게 거만하게 굴지 않았다. 마츠오는 주말이면 자전거를 타고 전읍에 있는 우리 집까지 놀러왔다. 마을 사람들은 면서기로 근무하는 내가 일본인 순사친구까지 둔 것을 매우 부러워했다. 그런 사실 때문에 아버지와 형님은 알게 모르게 목에 힘을 주는 것 같았다. 마을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아버지가 나에게 청을 넣는 식이었다. 사소한 것이지만 그런 것이 다 아버지나 형님이 술이라도 한 사발 얻어먹고 이루어지는 일들이었다.
나의 아내 김순조는 마츠오가 우리 집에 오는 날이면 친정 오라비가 온 것 보다 더 분접을 떨었다. 닭을 잡네, 떡을 하네, 야단법석이었다. 나의 아내 김순조와 에리코는 같은 동갑이었다. 거기다 하나씩 둔 아이들 나이까지 같았다. 나에게는 아들이 있고 마츠오에게는 딸이 있었다. 마츠오는 농담삼아 두 아이가 크면 사돈을 맺자고 했다. 나와 아내도 망설임 없이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도 내가 에리코를 처음 만난 것은 한참 뒤였다. 둘이 생활하는 곳이 관사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에리코가 바깥나들이를 별로 즐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츠오가 에리코를 데리고 우리 집에 오겠다고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에리코가 조선인 면서기가족을 만나보고 싶어 한 것은 아니었다.
마츠오는 처음 만날 장소로 백련정을 이야기했다. 백련정은 나와 마츠오가 일전에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었다. 아마도 돌아가 에리코에게 경치가 참 좋은 조선의 정자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이 호기심을 자극한 것 같았다. 나는 예의상 먼저 백련정에 가서 마츠오를 기다리기로 했다. 아내는 집에서 음식장만을 한다고 따라나서지 않았다. 마츠오가 부인과 아이를 데려올 것이므로 나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갔다. 예상과는 달리 마츠오는 나보다 먼저 백련정에 와 있었다.
“어서오시게. 하하하.” 마츠오는 호탕하게 웃었다. 나를 골려주려고 작정하고 일찍 출발한 것 같았다. 당황하는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며 즐기는 듯했다.
“이쪽은 우리 집사람 에리코일세.” 기모노차림의 전형적인 일본여인이 아이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나는 에리코와 처음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인사를 해야 하는데 갑자기 일본어를 다 잊어버린 사람처럼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와타시와 에리코데스. 도죠 요로시쿠 오네카이 시마스.”
지금까지 들어본 일본어 중에서 제일 감미로운 발음이었다. 백련정을 감아 돌아가는 대곡천 물소리도 그렇게 청량하지는 않았다. 내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딸아이가 제 엄마와 똑같은 인사를 했다. 그제서야 엉거주춤 인사를 건네었다. 아들은 일본어를 한 마디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멀뚱히 내 얼굴만 바라보았다. 내 안에 감추어져 있던 자존심 같은 것이 남아있어 아들에게 일본어를 한 마디도 가르치지 않았던 것인데 그 순간에는 후회가 막심했다. 에리코는 시골놈처럼 쭈볏대는 아들놈이 귀엽게 생겼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어떤가? 자네 부인처럼 건강하지도 못하고 일을 할 줄도 모른다네.” 에리코가 마츠오에게 살짝 눈을 홀기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에게 일을 시켜서는 안 되지요.”
에리코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미소를 잊을 수가 없다. 무수한 날들을 지우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날은 백련정의 경치를 함께 즐기다가 전읍의 우리 집에 들러 아내가 정성들여 차린 밥을 먹고 헤어졌다. 지금은 우리 집에서 있었던 일들이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아내가 닭을 잡았었는지 토끼를 잡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에리코 뿐이었다. 백랍처럼 하얀 얼굴에 웃을 때마다 옴폭 패여 들어가는 보조개가 내 머리 속에 화인처럼 깊게 각인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