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는대로 빼앗아간 일제, 악행 증명할 문서 찾아냈다

2024-06-03     차형석 기자
일제강점기 일본이 울산에서 양곡에 이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밥그릇과 반지 등 개인 소지품까지 공출해 간 사실이 문서에서 확인됐다.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 소장(부산외대 명예교수)은 2일 이 같은 내용이 담긴 문서를 입수했다고 밝혔다.

김 소장에 따르면 1910년 일본 제국주의는 한·일 합병과 동시에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해 전국적으로 토지 조사 사업에 착수했다.

김 소장은 “일제는 토지 조사 후 우선 단체명이 있는 토지에 이어 개인 토지를 빼앗았다”며 “토지 소유주는 소작자로 둔갑시키고 일 년 농사 지은 곡물을 공출(供出)했다”고 설명했다.

울산군수 호리요 네가즈오(堀米和雄)와 울산경찰서장 야마다 미치고오(山田三五男)는 쇼와 10년(1935년) 11월28일 울산에 사는 오다니 후미대로(大谷文出)에게 벼 16가마니를 공출하라고 양곡공출명령서를 보냈다. 오다니는 창씨개명(일본식 개명)으로 바뀐 성이며, 이름은 문출이다. 문출씨의 우리나라 성(姓)과 주소는 기록돼 있지 않다. 벼 1가마니 무게는 91근(54.6㎏)으로 하라고 지시했다. 문출씨는 농사를 짓던 소작농으로 추정된다.

김 소장은 “문출씨의 경작 토지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벼 16가마니가 공출된 것으로 보인다”며 “중·일전쟁을 앞두고 군량미 조로 일 년 지은 곡물을 전부 강제로 징발했다”고 말했다.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은 밀가루·옥수수 등 배급한 잡곡으로 끼니를 때운 것으로 전해졌다.

일제는 인력을 동원, 집집마다 조사해 금속류도 강탈했다. 오랫동안 쓰던 놋쇠 밥그릇(놋그릇) 또는 토기 그릇을 내놓아야만 했다. 놋그릇은 전쟁에 필요한 무기(총알)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다. 당시 놋그릇은 조선인의 보편적 식기류이다. 토기는 백자나 청자로 된 그릇으로, 주로 장식품으로 가지고 간 것으로 알려졌다.

김 소장은 조선인이 숨긴 액세서리(금)를 신고하라고 명령한 문서(홍보물)도 입수했다. 문서에는 1935년 11월15일 자정부터 조선 팔도에 있는 조선인 소유물은 모두 신고하도록 적시했다. 신고 물품은 반지·비녀·머리핀·넥타이핀·브로치·빗·시계·안경·단추·귀걸이·목걸이·도장·담배 파이프 등과 잔·꽃병·칼·상패·장식품 일체였다. 은행에 있거나 공공기관에 보관된 것은 제외했다.

신고 방법은 호주(戶主·동거인 포함)가 1935년 11월20일까지 관할 경찰서 구·읍·면사무소 조사위원회에 신고 양식에 맞게 누락이 없도록 했다. 만약 신고치 않거나 거짓 신고, 숨기고 일부만 신고하거나 신고를 이행하지 않을 땐 엄벌에 처했다.

김 소장은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혼과 얼을 잃었다. 식민지 정책사에서 찾을 수 없을 만큼 혹독한 강압 통치 행위였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금비녀를 빼앗기고 목숨을 끊은 양반집 며느리도 있었다”고 전했다.

한편 홍보물 사료와 공출명령서, 놋그릇 공출 사진은 소장하던 한국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일본연구가 미즈노 나오키 외 4명에게 제공해 ‘식민지 조선의 삶’(2012년 9월27일)이란 사료집을 편찬한 것에서 김 소장이 입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차형석기자 stevecha@ks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