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붉은 도끼[16]]3부. 하카다(3) - 글 : 김태환

2024-06-07     이형중

“마치 도끼로 머리를 내려치는 것 같았습니다”

K가 20년 전에 19명의 문창과 학생들에게 한 말이었다. K는 50년 전에 도끼로 살해당한 일본인 순사의 느낌을 정말 똑같이 느끼고 있었을까?

K는 시집 반구대를 출간하고 한동안 시를 쓰지 못했다. 모두들 뇌수술의 후유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대학에서 문학수업을 진행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글을 쓰는 것과 창작 강의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나는 K와는 반대로 그동안에 갇혀 있던 시적 감성이 폭발했다. 일주일에 두 번 수업이 있었는데 갈 때 마다 두 세편의 시를 써냈다. K도 놀라고 같이 수업을 들었던 19명의 학생들 모두가 신기한 눈으로 나를 주목했다.

무슨 일에나 한 번 빠져 들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라 시에 빠진 나는 그야말로 미친듯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 차를 몰고 경주로 달려가 왕들의 무덤을 찾아가는 것은 약과였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날에 간월재를 넘어 신불산을 오르기도 했다. 반구대 암각화에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들락거렸다. 반구대 암각화 입구의 식당은 하도 자주 드나들다보니 단골이 되었다. 식당이름은 -암각화 사진 속으로- 였다. 초대형으로 출력한 암각화 사진을 식당 안팎으로 걸어놓고 있었다.

그렇게 몸으로 달려간 곳마다 시가 태어났다. 그런데 반구대 암각화만은 예외였다. 가는 횟수는 제일 많은데 단 한 줄의 시도 나오지 않았다. K가 이미 숱한 시를 써낸 탓인지도 몰랐다. 반구대를 들락거리며 얻은 것은 암각화 사진 속으로 식당 앞의 작은 개울 건너편에 있는 너럭바위에서 공룡발자국을 발견한 것이었다. 공룡발자국 발견 소식은 지역의 매스컴에 한동안 오르내렸다.

암각화를 소재로 시를 쓰지 않은 것은 K때문인지도 몰랐다. 그가 농사지은 밭에 들어가 함부로 작물을 훔치는 행위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문창과 수업을 받는 학생 중에는 그가 즐겨 사용하는 시어를 그대로 베껴 쓰는 사람도 많았다. 내용은 다르지만 언어의 운율을 그대로 가져다 쓰면 누구의 작품인지 모호한 현상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모방은 창조라고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도둑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해 가을 추석 전날에 K의 집에 갔다. 그날이 K의 아내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그의 아내는 들어온 추석선물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쳐 등단한 제자들이 보내온 감사선물이었다. 선물 중엔 과일 인삼 더덕 따위의 농산물도 있었고 양주나 영양제 따위도 있었다. 그의 아내는 이건 누가 보내왔고 누구는 무엇을 보내왔다는 식으로 K에게 보고를 하듯 일러 주었다. K의 표정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마치 성공한 사냥 수확물을 메고 온 원시시대 사냥꾼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사업특성상 명절 선물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나에게는 유치한 소꿉장난처럼 보였다.

-내가 건네준 작은 조약돌 하나

소중히 주머니에 넣는 소녀가 있다면

나는 사랑하려네-

그 당시 내가 쓴 시였다. 나의 아내는 조약돌 따위는 쓰레기장에 휙 날려버릴 현실적인 여자였다. 보잘 것 없는 선물보따리를 소중하게 챙기는 그의 아내를 보는 순간, 시가 아닌 어떤 얄궂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해소병 환자처럼 야윈 볼에 움푹 패인 볼우물이 신들의 신전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날 이후로 나의 시는 서정을 벗어나 장르를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한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고삐가 풀린 야생마 같다고 했다. 시가 방향성을 잃어버리자 아내와의 갈등도 최고조에 달했다. 결혼 10년차가 넘었으니 권태기가 올만도 한 시점이었다.

나의 한 해는 그렇게 혼돈 속에서 저물어갔다. 새해가 되면서 문창과는 더 많은 학생들로 미어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