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붉은 도끼[20]] 3부. 하카다(7) - 글 : 김태환

2024-06-13     이형중

지금까지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김재성 노인이 독립운동가로 등록되기는 글러먹은 것이었다. 보훈처 직원이 일본어를 모른다고 해도 어떤 방법으로든 내용을 알아내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를 찾아내기보다는 친일파로 등록하려고 했을 것 같았다. 일본인 순사를 살해했다고는 하지만 완전히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먼 치정에 의한 살인사건이었다. 마침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해방되는 바람에 일본인 순사 살해사건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유촌 마을의 김인후에게 사건의 전말을 전해주고 보훈처 같은 곳은 얼씬도 하지 말라고 일러 주어야 할 것 같았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노트를 펼치기 전에 붉은 도끼를 집어 들었다. 적당한 무게감이 느껴지며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손으로 들고 사용하는 것 보다는 손잡이 나무 끝에 끈으로 매달아 사용하면 좋을 것 같았다. 얼마 전에 대곡박물관 전시관에서 연녹색 돌도끼를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대곡박물관은 대곡댐에 물을 담기 전에 발굴조사에서 나온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새로 세운 곳이었다.

살인도구였거나 말거나 박물관에 기증한다면 대단히 반겨할 것 같았다. 아직까지 국내에서 붉은 돌도끼가 발견된 적은 없었던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김재성 노인이 어떻게 도끼를 구하게 된 것인지 궁금했다. 분명히 붉은 돌도끼를 살인도구로 사용했던 것 같은데 50년 동안이나 일본에서 생활하다 돌아온 사람이 어떻게 돌도끼를 보관하고 있었을까 궁금했다.

글을 읽어보면 내용을 알 수 있겠지만 궁금증에 비해 글을 읽는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었다. 모바일 폰의 번역기능이 아니었으면 한 달이 되어도 모두 해석해 내기가 힘들 것 같았다.

붉은 도끼의 날을 손끝으로 만져 보았다. 도끼날에 손을 베일 것 같지는 않았다. 숫돌을 사다가 돌도끼의 날을 갈아볼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래도 중요한 유물인 것 같은데 함부로 원형을 훼손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옆에 같이 놓아둔 김용삼에게 구입한 홍옥석을 집어 들었다. 삼각뿔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돌도끼보다 무게가 가벼웠다. 손에 들고 표면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미세한 균열이 눈에 들어왔다. 균열이 있는 돌은 통째로 가공하는 게 불가능하다. 김용삼에게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연마석을 만들 모암은 무조건 크고 봐야 하는 것이다. 삼각형의 돌을 둥글게 가공하면 원래 크기보다 반 이상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돌도끼를 들어 날이 아닌 뿔 부분으로 균열이 있는 부분을 살짝 내려쳤다. 균열이 좀 더 선명해졌다. 조심스럽게 서너 번 더 내려치니 맥없이 둘로 갈라졌다. 갈라진 면은 겉면보다 어두운 색이었다. 삼각형의 돌이 한 번 더 쪼개지고 나니 면이 더 날카로워졌다.

나는 얼른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동네 가운데 있는 철물점으로 갔다. 농촌에서 사용하는 낫을 가는 숫돌을 찾으니 그런 물건은 취급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에 낱장으로 파는 샌드페이퍼가 있다고 했다. 100번 샌드페이퍼와 400번 그리고 1000번을 다섯 장씩 샀다.

집으로 돌아와 싱크대 위에 칼도마를 놓고 100번 샌드페이퍼를 깔았다. 깨진 홍옥석 원석의 크기는 10cm정도였다. 한 손에 쥐고 갈기에는 딱 맞았다. 돌을 갈아대는 것이 얼마나 끈질긴 인내력을 요구하는지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시작하면 끝을 보고 마는 성격이었다. 샌드페이퍼 위에 물을 뿌려가며 한 시간 정도 꼼짝 않고 돌을 갈아댔다. 처음에는 갈리는 표시조차 나지 않았다.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연한 흙빛물이 갈려나왔다.

두 시간을 갈고 나니 제법 갈아낸 티가 났다. 그러나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칼날을 만들어 내려면 하루 두 시간씩을 갈아도 한 달이 넘게 걸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