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동해 너머 창칼 부딪는 소리 들었던 장희춘을 기림
울산인은 임란 의병장 장희춘(蔣希春 1556~1618)에게 정성스러워야 한다. 왜란의 기미를 알아챘던 식견을 눈여겨봐야 하며,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일본견문록을 남긴 점도 주목할 만하다. 서생포왜성에서 가등청정과 회담할 때 사명당과 함께 들어가 적정을 살핀 점과 의병을 이끌고 활약한 무훈도 높이 사야 한다. 중국귀화 성씨로서 강동 달곡에 세거지를 이루어 울산의 인적 자산을 키워준 점에도 감사해야 한다.
성재(誠齊) 장희춘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에 그 기미를 알아차리고 동지를 규합해 칼을 벼렸다. 왜란기미를 일찍 알았다는 사실은 임란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질 부분이지만 별로 주목되지 않았다. 최근 성범중 교수가 쓴 <역주 성재실기>를 읽고 울산은 일본의 숨소리도 들을 수 있는 지근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성재는 1591년 11월28일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쟁이 일어날 기미를 알리고 쇠 185근을 보내면서 창(槍)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이 편지에 앞선 그해 2월9일에는 일찌감치 전쟁의 조짐을 느끼고 ‘환난 속에 죽는다면 운명이 쇠퇴한 것일까’라는 비감한 편지를 지인에게 보냈다. 임란은 1592년 4월13일 왜적이 부산바다에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편지를 보낸 시점을 보면 전쟁발발 1년2개월 전에 조짐을 느꼈던 것이다. 이런 정보가 있었기에 전쟁발발 직후 울산은 어느 곳보다 빠르고 침착하게 의병대오를 갖출 수 있었을 것이다. 왜군이 침공할지 말지를 두고 조정에서 옥신각신 할 때에도 울산에서는 풍향에 실려 오는 전운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왜군이 전선을 모으고 항구에 결집하는 소소한 내용들이 어민이나 밀무역상을 통해 전달됐다고 본다. 한때 울산에 염포 개항지가 있었기 때문에 정보수집이 빨랐을 것이다. 정보를 입수하고도 중앙 정부와 소통되지 않았던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애가 끓는다.
성재의 뛰어난 점은 왜란이 끝나고 10년이 지난 1607년 사행단으로 일본을 다녀온 견문록 <해동기(海東記)>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나라에는 <표해록(漂海錄)>, <표주록(漂舟錄)>, <표사록(漂錄)>, <간양록(看羊錄)>이란 이름의 일본 견문록이 있다. 울산출신으로 그와 같은 기록물을 남긴 사례는 성재의 <해동기>가 유일하다. <해동기>에는 임란 이후 가장 이른 시기 일본에 건너가서 포로가 겪는 참상을 보고 기록한 내용이 있다. 부산에서 대마도-오사카-나고야-에도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서 포로를 만난 사례는 13차례 이상이다. 그 인원은 수백명이 넘고 기록된 사연 또한 절절하다.
<역주 성재실기>는 이 <해동기>가 처음 기록된 뒤 묻혀 있다가 1960년대에 그 존재가 알려졌다고 설명돼 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임란 뒤 울산 산촌에 터전을 잡은 성재의 활동영역이 한정됐을 수 있고, 또는 그의 저술에 주목하지 못한 향촌의 한계일 수 있다. 보다 크게 본다면, 일본의 동태를 살피고 대응했던 성재에게서 교훈을 얻지 못했기에 1910년 국치를 당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성재는 일본어를 알았다고 한다. <역주 성재실기>는 성재가 일본어 회화에 통했기 때문에 일본 사행에 참여했을 것으로 설명했다. 사명당과 함께 서생포 회담에 참가한 것도 일본말을 알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변방에 살면서 이웃 나라의 언어를 미리 공부해뒀기에 요긴하게 쓰였을 것이다. 두루 알 듯 울산을 포함한 동남해안은 대왜·대일 교섭과 관련, 가장 격심한 통증을 겪은 곳이다. 고대 신라 때 연오세오가 직조 기술을 가지고 도일하고, 천일창이 제철 기술을 지니고 넘어갔다. 되돌아온 것은 석우로와 박제상의 죽음이었다. 그 뒤 고려 말 왜구침공, 조선의 임진 정유의 난리 그리고 한일합방이었다. 역사적 맥락을 감안하면, 성재 장희춘에 대해 좀 더 면밀히 탐구해서 대일관계를 안내받는 등대로 삼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런 역사의 등대를 비추려면 동해 저 너머를 바라보는 곳에 기념상이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김한태 향토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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