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말하다 ⑥(끝)]셸리와 시 재단 : 인문학적 상상력의 효용

2024-06-21     경상일보

‘책을 말하다’ 시리즈의 마지막 필자로서 앞선 옥고들에 부끄럽지 않은 마무리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도서관을 찾았다. 그러던 중 ‘평리문고’에서 영문학과 관련된 흥미로운 책을 몇 권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시리즈의 첫 기사에서 소개되었다시피, ‘평리문고’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전 동덕여대 조병무 교수가 기증한 8000여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증자가 영문학자가 아닌 관계로 자료들은 주로 국문학 분야에 한정되어 있으나, 해외 작품의 옛 번역본도 적지 않게 눈에 띄고, 아주 드물지만 영어로 된 자료들도 찾아볼 수 있다.

필자의 눈에 처음 들어온 책은 영국의 낭만기 시인 퍼시 비쉬 셸리(Percy Bysshe Shelley, 1792-1822)의 <시를 위한 변론(A Defence of Poetry)>(1821)을 비롯한 여러 산문 작품을 번역한 <시의 옹호(詩의 擁護)>(윤종혁 역, 새문사, 1978)이다. 셸리의 <시를 위한 변론>은 효율성과 계산적 이성이 중시된 당대 영국의 공리주의적 경향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시와 상상력의 중요성을 역설한 명문이다. 그는 사회 개혁가로서 현실 정치에 뛰어드는 것을 고려한 적도 있으나, 그보다는 시인으로서 고유의 방식으로 작품과 글을 통해 정치적 변혁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셸리는 자기 작품에 담긴 개혁적 사상이 당대의 독자에게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한계 의식도 갖고 있었고, 그런 고민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시인을 “세계의 공인되지 않은 입법자”라고 정의 내리기에 이른다.

윤종혁의 역서는 <시를 위한 변론>뿐 아니라 사랑, 생명, 도덕, 평등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셸리의 여러 산문을 우리말로 옮겼다. 1980년대 이전에 출판된 책인 만큼 세로쓰기로 인쇄가 되어 있는데, 책의 구조가 사뭇 흥미롭다. 세로쓰기가 적용된 한국어 부분은 책장을 오른쪽으로 넘겨야 하는데, 역자는 <시를 위한 변론>의 영어 원문을 책 반대편에 가로쓰기 방식으로 담아 책장을 왼쪽으로 넘기도록 했다. 한글을 가로쓰기로 인쇄하는 요즘에는 절대 볼 수 없는 방식으로, 마치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처럼 책의 앞뒤에 표지가 있다.

셸리의 산문 작품들은 1822년에 사망한 시인의 200주기에 즈음해 2020년에 새로운 번역으로 출판되었다. 바로 <셸리 산문집: 예언의 나팔소리>(김석희 역, 이른비, 2020)로, 이전의 번역본에 포함된 산문뿐 아니라 무신론, 채식주의, 사형 등 현재도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주제들을 다룬 글들도 여기에 실려 있어, 시대를 앞서간 그의 생각들을 접할 수 있다. 또한 셸리가 그의 아내 메리 셸리(Mary Shelley, 1797-1851)의 소설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1818)에 덧붙인 서문 역시 포함돼 있어, 셸리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 독자들에게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소설을 통해 그를 소개하려 한 역자의 의중도 엿보인다.

셸리는 가장 유명한 산문이자 미완성작인 <시를 위한 변론>에서 시와 문학의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시한다. 그는 시와 문학을 사랑, 공감과 결을 같이 하는 상상력에서 발생한다고 보았고, 그런 점에서 시가 인간의 문명과 도덕, 그리고 시대정신을 간접적으로 만들어 간다고 주장한다. 셸리가 이 글의 초반부터 강조하듯, “창조한다”는 의미의 그리스어(το ποιειν)를 어원으로 둔 시(poetry)는 인간 사회를 형성하는 중요한 문화적 산물이자 행위인 것이다. 또한, 그가 비판한 19세기 초의 공리주의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21세기의 자본주의가 공통적으로 효율성과 유용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그의 견해를 살펴보는 것은 시의적절하다. 합리주의의 물결 속에 당시 힘을 얻어가고 있던 시의 무용론에 대항해, 그는 효용이란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 정의하면서 시와 문학이 추구하는 효용이야말로 최고 의미에서의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진정한 효용이라 주장한다. 도리어 계산적 이성이 추구하는 좁은 의미의 효용은 이기심과 불평등을 초래했다는 점을 셸리는 통렬하게 지적한다.

‘평리문고’에서 찾은 또 다른 흥미로운 자료는 <시(Poetry)>라는 월간간행물이다. 시카고 지역에서 1912년에 창간된 본 잡지는 현재 영어권에서 출판 중인 시 관련 간행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20세기 초 모더니즘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걸출한 시인들이 작품을 선보인 공간이다. ‘평리문고’에는 1973년과 1974년에 걸쳐 총 6개월치 분량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 중 1973년 11월호에는 미국 현대시에서 가장 중요한 시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존 애쉬베리(John Ashbery, 1927-2017)의 시가 실려 있으며,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시인들이 작품을 통해 상상력을 펼치고 있다. 현재 <시>에는 매년 15만편이 넘는 시가 기고된다고 한다.

<시>는 창간 이래 근 100년간 명맥을 유지하던 중, 2003년에 자선사업가인 루스 릴리(Ruth Lilly)로부터 거의 3000억원(미화 2억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자산을 기부받아 시 재단(Poetry Foundation)을 창립하게 된다. 시 재단은 세계 최대 규모의 문학 재단으로서 다양한 방식으로 시인들과 문인들을 지원하고 있으며, 재단에서 운영하는 웹사이트(www.poetryfoundation.org)는 영어권의 시 데이터베이스를 전 세계와 공유하고 있다. 이제는 <시>에 실린 시들을 1912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재단이 운영하는 웹사이트에서 살펴볼 수 있게 돼 인쇄된 잡지의 수요는 줄었겠지만,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현대 사회에서 시와 문학을 지켜내고자 했던 <시> 운영진들과 여기에 기고한 수없이 많은 시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시 재단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 디지털 아카이빙이 대세가 되면서, 전통적 형태의 책에 관한 관심은 줄어들고 도서관은 지금과 많이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금전적 이득이라는 좁은 의미의 효용 기준에 따라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문학, 역사, 철학이 외면되고 인문학 도서들이 무분별하게 처분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루스 릴리가 3000억원으로 구매하려 한 것은 아마도 인문학적 상상력이 가지는 ‘즐거움’이란 효용, 그리고 그것이 담보할 인류의 밝은 미래일 것이다. 셸리가 썼듯, 도덕의 위대한 비법은 사랑과 상상력이고, 시인은 현재에 드리워진 미래의 거대한 그림자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오세인 울산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