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붉은 도끼[27]]4부. 아름다운 호수 (5) - 글 : 김태환
떠나가지 않은 사람들은 떠나지 못해서 불만이고 떠나간 사람들은 사라져 버린 고향이 그리워 불만이라고 했다.
“내 혼자라도 고향집에 와서 누워 있으면 내가 온전히 살아 있는 것 같아요. 여기 있었으니 작가님도 만난 것이 아닙니까. 자, 한 잔 더 합시다.”
김인후도 나도 점점 취기가 올랐다. 김인후는 예전에 고향 동산을 지키던 소나무가 죽어 뿌리에 정기를 모았다가 자신에게 몽땅 내어주는 것이라며 주저 없이 마셔댔다. 시간이 자정 가까이 되었을 때 술병이 비었다. 김인후는 술을 한 병 더 내어 오겠다고 했는데 몸이 흔들리고 혀가 꼬부라져 더 마시는 것은 무리일 듯 했다.
술상을 대충 밀어놓고 이부자리를 폈다. 늦가을 날씨가 쌀쌀했지만 보일러를 켜놓았는지 방 안이 훈훈했다. 김인후는 자리에 눕자마자 바로 코를 골았다. 나도 일부러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고속열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몸을 흔들어댔다.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유촌 마을에 처음 왔던 생각이 떠올랐다. 예전부터 버드나무가 많아 유촌이라 불렀다는 생각을 하다가 마을 아래쪽 냇가에 무성하게 들어서 있는 버드나무 숲이 떠올랐다. 미호천 냇물 가운데 서 있다 쓰러지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일렁이던 버드나무 숲이 눈앞에 선연하게 떠올랐다. 롤러코스트 궤도처럼 흔들리던 삼정교의 모습도 떠올랐다.
사실은 버드나무숲이 움직인 것이 아니라 내 몸의 평형 유지기관에 이상이 생긴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당시에 나타났던 원시인 복장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화 촬영 중이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김인후의 대답은 그때 유촌 마을을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보았던 것은 무의식 속에 나타났던 환영이었다. 그때 보았던 원시인복장의 무리들을 떠올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영화에서나 보았음직한 모습이었다. 실제로 원시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를 것 같았다. 넘쳐나는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진실과는 거리가 있는 착각 속에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원시인이 나오는 영화가 한 두 편이 아니겠지만 입고 있는 복장은 대개가 비슷하기 마련이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기에 처음에 설정해놓은 모습이 계속 반복되다가 사실인 것처럼 굳어지게 되는 것이다. 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들이 모두 진실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고속열차가 또 한 대 지나갔다. 밤이 깊어서인지 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잠이 소리를 덮어버려야 할 텐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소리의 그물에 엉켜 하룻밤을 온전히 망쳐놓을 것 같았다. 김인후는 입을 떡 벌리고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벌써 새벽 두 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