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장이지 ‘롱 러브레터’
내 안에는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있고 어머니에게서 온 것이 있다 아버지에게는 할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있고 할머니에게서 온 것이 있다 어머니에게는 외할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있고 외할머니에게서 온 것이 있다 내 안에는 말이 있기도 전의 영구동토층 아래의 어둠에서 온 편지가 있고 또 그 이전의 일월성신에서 온 편지가 있다 한 사내가 눈 덮인 천산을 등에 지고 내려온다 광주리 가득 말린 물고기를 담은 아낙이 강을 건넌다 두 개의 엇갈리는 길이 꿈의 매듭을 지은 편지가 내 핏속을 돈다, 하여 나는 얼마간 남자이고 얼마간 여자이다 얼마간 바람이고 흙이다 결코 한겹일 수 없는 미지(未知)이다 잠 못 드는 밤 나는 내 안의 먼 피를 떠도는 긴 사랑의 편지를 홀로 읽는다 이토록 붐비는 사랑이라니 이토록 사무치는 연연이라니…
나는 조상들의 사랑의, 사랑의 결과물
아직도 ‘편지의 시대’를 꿈꾸는 시인은 너와 나의 소통뿐 아니라 먼 조상들이 전하는 메시지로서 편지를 상정한다.
‘나’는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로 거슬러 가다 보면 최초의 어떤 기원이 나올 것이다. 시인은 ‘영구동토층 아래의 어둠’과 ‘일월성신’에서 발송된 ‘편지’가 먼 조상을 거쳐 와서 ‘나’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때 편지는 조상들의 DNA를 전하는 매개체이자 아득한 시원부터 그들의 기억을 전하는 ‘기억 전달자’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나’는 자연에서 태어났으므로 ‘바람이고 흙’이며, 편지만으로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이다. 다만 그 편지는 ‘사랑의 편지’이다. ‘나’는 사랑을 통하여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으므로.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은 조상들의 사랑의, 사랑의, 사랑의 결과이다.
천산을 등에 진 사내와 물고기가 든 광주리를 인 아낙의 러브. 눈사태가 날까 조바심도 쳤으리라. 발을 잘못 디딜까 조심조심 손도 잡았으리라. 그 사연들의 중첩이 ‘나’를 낳았고 그 ‘붐비는 사랑’이 ‘내’ 핏속을 돌고 있다. 그야말로 롱롱 러브레터.
송은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