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붉은 도끼[43]]5부. 조선인 다케시(8) - 글 : 김태환
에리코는 이미 내가 집에 오기 전에 회사에서 있었던 여비서와의 일을 알고 있었다. 자기 딴에는 나를 위한다고 꾸민 일이었다.
나는 에리코 앞에서 어린애처럼 눈물을 흘렸다. 무엇보다도 내 결심을 몰라주는 에리코가 야속했다. 욕망의 갈등보다 더한 죽음의 신도 내 결심을 흔들어 놓지는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에리코. 당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어요. 단지 내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돼요. 알았죠?”
나는 어린애처럼 울었다. 나의 볼을 쓰다듬어 주는 에리코의 손에서 어머니의 따듯한 손길을 느꼈다. 에리코는 내가 깊이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 주었다. 나는 그날 밤 오랜만에 백운산을 흘러내리는 대곡천을 꿈꾸었다.
일기를 덮고 나니 새벽 한 시였다. 서재를 나와 안방으로 들어가니 아내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침대에 올라가 아내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팔을 뻗어 허리를 감싸 안으니 출렁하는 뱃살이 손에 잡혔다. 젊어서는 날아다닌다고 할 만큼 날씬했던 몸이었다. 35년을 함께 살아오면서 나만 늙은 것이 아니었다. 이미 폐경이 한참 지났으니 여자로서의 기능은 다한 셈이었다.
생각하면 별 무리 없이 평생을 함께 살아준 것만으로 아내에게 감사할 일이었다. 그런데 이 마음속의 이율배반적인 동요는 무엇이란 말인가? 생활과 사랑은 전혀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것일까? 김재성이란 노인은 아내와 아들까지 버리고 사랑하는 여자를 따라 일본으로 떠나갔다. 사랑 때문에 조국까지 배신한 것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아련한 상처처럼 남아있는 내 사랑이라는 것은 미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간밤에 잠을 설친데다 이미 밤이 깊어있어 저절로 눈이 감겼다. 잠결에 아내가 몸을 뒤채는 걸 느끼고는 바로 꿈나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