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붉은 도끼[48]]6부. 암각화 (5) - 글 : 김태환
“돌이 이렇게 붉으니 신기하기는 하네요.”
“기다려봐. 내가 세상에서 둘도 없는 귀한 보석을 만들어 올 테니.”
결혼기념일을 까먹은데 대한 아내의 실망은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 외식을 하러 나가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라 집에서 조촐한 저녁상 앞에 마주 앉았다. 그래도 35주년 결혼기념일인데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오래 전에 사다 놓은 고급 와인을 한 병 땄다.
와인 잔을 부딪치며 아내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쌍거풀 진 둥근 눈이 막 피어난 꽃과 같던 시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아내의 눈꼬리와 목의 주름에 세월의 흔적이 여실히 드러나 보였다. 마른 겨울 풀밭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쓸쓸함이 묻어났다.
와인을 곁들인 저녁을 마치고 모처럼 거실에서 오붓한 시간을 함께 보냈다. 한 때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집 안을 가득 메우던 시절도 있었다. 아이들을 모두 내보내고 둘 만 남은 집안에는 생기가 없었다. 잎과 열매를 모두 떨구고 난 겨울나무처럼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여보. 당신은 아직도 나를 사랑해요?”
한 잔의 와인에 아내의 볼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 모습이 예전처럼 예뻐 보였다.
“그럼 사랑하고 말고.”
나는 아내의 손을 힘주어 쥐었다. 아내가 방긋 웃었다.
“벌써 35년이에요. 세월이 뭐가 이렇게 빠르죠? 누군가에게 도둑맞은 기분이에요.”
나는 아내의 말에 흠칫했다. 아내가 도둑맞은 것은 세월이 아니라 사랑인 것 같았다. 어디 한군데 드러내 나무랄 곳이 없는 아내를 두고 내 마음이 이렇게 몽롱한 곳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이 넌센스였다. 도대체 사랑이란 것은 무엇인가? 원론적인 물음부터 파고 들어가 보아야 할 것 같았다. 한 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매일 마주보고 있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아내의 따듯한 손을 잡고 있어도 떠오르는 핼쓱하고 새하얀 볼에 움푹 파인 볼우물은 무엇일까?
다음 날 아침 일찍 김용삼에게서 전화가 왔다. 홍옥석을 캐던 광산을 찾으러 백운산에 같이 가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곧바로 가겠다고 했다. 홍옥석 광산이 있던 자리를 찾는 일이라면 열일을 마다하고 가볼 참이었다. 김용삼은 비싼 홍옥석을 찾기 위해서지만 내가 찾으려는 것은 홍옥석에 묻힌 이야기였다.
아침밥을 챙겨먹고 부지런히 반곡으로 차를 몰았다. 김용삼은 집 앞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등산복 차림에 작은 배낭을 짊어지고 강철로 만든 쇠지렛대를 들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나의 차림새는 허름했다. 그냥 청바지에 등산화만 달랑 신은 상태였다. 모자조차도 챙기지 않았다. 내 차는 집 앞의 빈터에 세워놓고 김용삼의 낡은 사륜구동차에 올라탔다. 반곡에서 미호천 상류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국도를 달리다 시골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올라가니 미호라고 부르는 복안저수지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