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붉은 도끼[53]]7부. 유리(1) -

2024-07-30     이형중

유리는 누가 뭐래도 나의 딸이었다. 유리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마츠오가 틀림없지만 어려서부터 아비 노릇을 한 것은 나였다. 유리도 당연하게 나를 아버지로 여기고 살았다. 불과 다섯 살에 친아버지와 헤어지고 줄곧 나와 함께 한 집에서 살았으니 마츠오와 내가 분간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제 어미인 에리코 보다는 나에게 더 살갑게 굴었다.

유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갈 무렵이 되어서 집안이 매우 윤택해져 있었다. 자기가 이루고 싶은 꿈이 화가였기에 동경미술대학에 갔다. 나는 유리가 어린 시절에 같이 그림을 그린 적은 있지만 대학에 가서 무슨 그림을 그리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런데 유리의 대학 졸업 작품전시회에 가보고 깜짝 놀랐다.

그림 내용이 온통 내 눈에 익숙한 것들이었다. 그것은 분명 유리가 어릴 적에 내가 도화지에 어설프게 그려주었던 천전리 각석에 새겨져 있던 그림들이었다. 본래의 모양과는 많이 변형이 되고 채색까지 되어 있었지만 분명 암각화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유리를 조용한 곳으로 불러 물어보았다. 어렸을 때 내가 그려주었던 그림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전시회의 제목이 아주 오래 된 사랑이라고 지은 것도 다 뜻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아빠가 저를 무지 사랑하셨잖아요. 엄마도요.”

유리의 대답에 눈물이 핑 돌았다. 대답 대신 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 유리가 그렇게 기특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내 가슴 속에 사랑이 충만하게 넘쳐나는 기분이었다. 에리코를 향한 내 마음이 한 다리를 건너 유리를 통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사랑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자신에게 손해나는 것이 아니다. 퍼주면 퍼 주는 대로 넘쳐나는 것이 사랑이다. 내가 되뇌었던 말이었다. 나는 유리를 통하여 사랑의 절정에 올라 있었다. 일본에 건너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예전 조선에서 있었던 일은 이제 까마득한 과거가 되어 점점 흐릿해져 갔다.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백련정에서 처음 보았던 젊은 에리코의 모습이었다. 박꽃처럼 파리한 얼굴에 옴폭 패인 볼우물, 내 머릿속에 화인처럼 깊게 박힌 모습이었다.

유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화가로 활발한 활동을 할 것 같았는데, 일 년 후에 결혼을 선택했다. 결혼식에서 신부 입장할 때 내가 유리를 데리고 들어갔다. 딸을 시집보내는 아비의 마음은 무척 서운하다고들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뿌듯한 성취감이랄까, 그런 행복감에 젖었다. 유리는 식이 모두 끝나고 나서 내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

“아빠 혹시 어릴 때부터 내 꿈이 뭐였는지 아세요?” “화가가 되는 게 꿈이 아니었나?”

“아니에요. 내 꿈은 동생을 보는 것이었어요. 두 분은 끝내 내 꿈을 모른 체 하셨지요.”

나는 유리의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