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붉은 도끼[56]]7부. 유리(4) - 글 : 김태환

2024-08-02     이형중

“제 알몸을 보이기 싫어요.” “그건 왜요?”

“늙은 노파의 몸을 보이기 싫거든요. 그냥 이렇게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항상 30년 전의 모습만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제 젖가슴을 보는 순간에 당신은 놀라서 조선으로 도망치고 말거예요. 살이라고는 없는 늙은 노파의 몸을 보게 될 테니까요. 끝까지 제 젊은 날의 모습만 기억해 주세요.”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한 이불 밑에 누워 있는 것으로도 세상 모두를 얻은 것만큼 행복했다.

“그렇게 할 수 있겠죠?”

에리코는 재차 다짐을 받으려 재촉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코의 손을 지그시 힘주어 잡았다. 그 첫날 밤 무언의 약속은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졌다. 둘의 대화는 밤낮 없이 이어졌고 손을 잡거나 가볍게 끌어안는 스킨십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누가 보아도 부러울 것 없는 잉꼬부부였다. 두 사람의 변화를 제일 반긴 것은 유리였다.

유리는 화가로서의 길을 접고 대곡건업의 인테리어팀에 합류했다. 유리의 남편 요시노리도 처음에는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접고 대곡건업에서 일을 배워 나중에는 중요한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나는 나이가 들어도 걱정거리가 없었다. 나는 전적으로 유리와 요시노리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대곡건업의 다음 승계자는 유리와 요시노리라는 것을 모두가 인정했다. 나와 에리코는 넉넉하게 시간을 내서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국내여행은 물론이고 겨울이면 따뜻한 동남아에 가서 한 철을 보내고 벚꽃이 만개할 때 들어오기도 했다. 틈이 날 때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보았다. 그러나 가지 않은 나라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한국이었다. 나도 그랬지만 에리코도 한국에 대해서는 일체 입을 떼지 않았다.

1988년은 내가 70세가 되는 해였다. 한국에서는 서울 올림픽이 열렸다. 유리는 나와 에리코에게 올림픽관광을 다녀올 것을 권유했지만 두 사람은 이야기 자체를 듣지 않은 것처럼 침묵으로 일관했다. 막상 올림픽 기간이 되자 유리와 요시노리가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엘 다녀왔다.

비행기로 서울로 가서 올림픽 개막식을 보고나서 버스로 경주관광을 하고 부산으로 와서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 후쿠오카로 돌아왔다. 유리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둘러보기 위해 언양에 들렀는데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더라고 했다.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오는데 맥없이 눈물이 쏟아지더라고 했다.

“왜 그런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어요. 배를 탔던 기억도 남아있지 않았는데요.”

그런 말을 하면서도 눈물이 나려고 하는 지 목소리가 젖어 나왔다.

“그리고 가이드가 언양에 왔으면 꼭 보고 가야 할 곳이 있다며 우리를 데려갔어요. 물이 맑은 개울가였는데 비스듬한 바위에 알 수 없는 그림들이 새겨져 있었어요. 가이드의 말로는 수천 년 전의 원시인들이 새겨놓은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내가 그렸던 그림들이 거기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