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가을의 문턱, 입추(立秋)에 생각하는 ‘독서’

2024-08-09     경상일보

며칠 전 부산에 갔다가 오는 길에 ‘장생포 문화창고’ 내에 있는 북카페 ‘지관서가(止觀書架)’를 들른 적이 있다. 삼복더위에도 자녀들과 함께 책을 읽는 사람들이 여럿 보이고 넓은 유리창 밖으로는 크고 작은 어선들이 옹기종기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염소 뿔도 녹인다는 ‘대서(大暑)’가 보름이나 지났지만, 지구온난화로 인한 급격한 기후변화로 매일매일 극심한 폭염이 지속하는 가운데 그제 ‘입추(立秋)’도 지났다. ‘입추’는 여름이 가고 가을로 접어든다는 절기로, 늦더위가 있기도 하지만 이때부터는 밤에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다가오는 겨울 채비로 김장용 배추를 심는 시기이다.

수필가 이희승은 ‘청추수제(淸秋數題)’에서 가을을 대표하는 ‘벌레, 달, 이슬, 창공, 독서’ 등 다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을 논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지만, ‘독서’는 마음의 양식을 쌓는 중요한 노작(勞作) 활동이다.

문체부에서 2018년부터 ‘생애주기별 책의 해’를 지정·운영하고 있는데, 올해는 ‘어린이 책의 해’로 정했다고 한다. 또 매년 4월23일은 독서 증진과 출판 장려, 저작권 보호 촉진을 목적으로 UNESCO가 지정한 ‘책의 날’이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책을 열면 세상이 보인다’는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책(冊)’의 발명은 오랫동안 인류문명의 발달과 지식의 축적에 유의미한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탈무드에 따르면 유대인은 글자를 처음 가르칠 때 책에 꿀을 발라 놓는다고 한다. 그만큼 그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독서를 습관화하고, 즐겁게 책을 대하도록 획기적인 방법을 고안했던 것 같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라는 의미의 ‘수불석권(手不釋卷)’이나 ‘주경야독’은 책을 가까이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성어이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독서 동아리가 존재하고, SNS를 통해 좋은 독후감을 발표하는 문인이나 독서가들도 다수 활동하고 있지만, 문체부가 발표한 ‘2023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 의하면 대한민국 성인 10명 중 7명이 일 년에 종이책 한 권도 안 읽는다는 통계가 나왔다.

물론 현대는 디지털시대로 전자책, 웹툰, 웹소설, 포토북 등 영상매체의 역할이 두드러지지만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책을 읽느라 화장실 가거나 밥 먹는 시간마저 놓치는 ‘책벌레’ ‘독서광’이란 말이 유행했었다.

역사적으로도 보면,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가난한 서자 출신으로 추울 때나 굶주릴 때도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며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으로 자신을 ‘간서치(看書癡)’라 명명한 바 있다.

10살에 겨우 글을 깨우쳤으나 끝없는 노력으로 58세에 과거 급제한 김득신(1604~1684)은 한번 잡은 책은 완전히 습득할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고 <사기(史記)>의 ‘백이전(佰夷傳)’을 무려 11만3000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또 공자(B.C.551~B.C.479)가 <주역>을 철(級)한 가죽끈이 세 번씩이나 닳아 끊어질 정도로 많이 읽었다는 고사에서 ‘위편삼절(韋編三絶)’이란 말이 생겼다.

저들처럼 우리가 글 읽기에 과도하게 탐닉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다만 감정 없는 AI나 디지털의 개입 없이 윤전기(輪轉機)의 싱싱한 잉크 냄새로 가득한 종이책을 가까이할 때 잠들어 있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하고 망중한의 여유를 즐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가을에는, ‘책은 남에게 빌려주지도 말고, 빌린 책은 돌려주지 마라’는 농 섞인 금언(金言)을 들지 않더라도 몇 권의 책을 준비해두고 싶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버섯의 포자처럼 멸종하지 않고 종이책의 명맥이 이어지기를, 그리고 ‘독서’라는 단어가 영원히 존속하기를 바란다.

권영해 시인·전 울산문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