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세 이기수씨가 들려주는 ‘79년 전 광복의 그날, 울산’]“시내 일본인 사장들 사라지고 해방 실감”

2024-08-13     강민형 기자
1945년 광복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79년 전이다.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이들은 대부분 울산에 있지 않았고, 울산에서 살던 이들 중에 기억을 갖고 있던 이들은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 남은 이가 극히 드물다. 12일 울산 남구 무거동에서 만난 이기수(96)씨는 당시에 대한 기억을 온전히 갖고 있는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다.

당시 10대였던 이기수씨에게 그날은 흐릿하게 나마 기억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당시를 회상하던 이씨는 “(제가 살던) 중구지역에는 강제 징용이 빈번하게 이뤄졌다. 동네에서는 강제로 젊은 사람들이 광산, 노동 현장에 투입됐다”고 말했다. 또 이씨는 “아들, 딸 하나씩 있던 이웃집에 찾아온 일본인들이 ‘딸을 (위안부에) 안 내놓으면 아들을 징용 보내겠다’고 하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고도 말했다.

광복을 앞두고 국제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던 때 울산은 평소처럼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이 만연했다며 “당시 울산 시내에서 큰 상점을 하는 사람들은 전부 일본 사람일 정도였다”고 이씨는 기억했다.

이후 1945년 8월15일 히로히토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앞선 8월6일과 9일,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은 뒤다.

집에서 틀어둔 라디오를 통해 “일본 천황이 패전을 선언한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이씨는 회상했다.

당시 17세였던 이씨는 일본의 패전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주변에서는 “곧 독립이 될 거라더라”는 이야기만 어렴풋이 돌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울산은 해방 이후에도 해방이 된 줄 모르거나, 믿지 않았던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제가 하루아침에 물러간다는 걸 믿지 못했던 탓”이라고 했다. 하지만 삼산에 있던 일본군 비행장이 비면서, 막혔던 ‘옛 삼호교’를 통해 장생포로 가는 길이 열렸고, 울산의 유일한 백화점이던 옥교동의 ‘송중’백화점 일본인 주인이 사라지며 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이씨는 기억했다.

이씨는 “어느 순간 시계탑 모서리에 있던 전기 잡화 상점, ‘서곡’사진관 등 큰 점포들을 운영하던 일본인들도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광복의 기쁨에 취하기도 전에 사회는 급변했다. 시내에는 이념 싸움에 신탁통치 소식이 잇따랐다”고 했다.

이를 두고 울산 광복회 관계자는 우리나라가 광복의 기쁨을 누리고 새로운 출발의 기틀을 다지지 못한 점을 아쉬운 점으로 꼽았다. 일제의 잔상이 가실 새도 없이 사회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몰두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일제강점기는 기억 속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남진석 울산광복회 지부장은 “일본과 좋은 국제 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있지만 역사가 미화돼서는 안된다”며 “당시 건물, 기록은 사라졌어도 일제의 식민 역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과거가 반복되지 않게 늦게라도 제대로 된 당시 역사와 독립운동가 발굴에 힘써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본보 취재를 종합하면, 광복 약 한 달 전부터 심상치 않은 국제 정세가 감지되기도 했다. 1945년 7월21일, 당시 미군 B29는 울산·부산 일원을 본격적으로 폭격하기 시작했다. 1945년 7월23일 발간된 매일신보에는 미국 비행기가 울산 앞바다에 있던 선박을 공격해 경미한 피해를 입혔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강민형기자 min007@ks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