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붉은 도끼[64]]8부. 사막(9) - 글 : 김태환

2024-08-14     이형중

“아, 네. 그러시죠.”

예의상으로는 김은경 시인의 강의를 들어주어야 했다. 그러나 강의 내용이 머리에 들어올 리 없었다. 김은경 시인도 분위기로 보아 그럴 것이라는 걸 알아챈 것 같았다.

“그럼 여기서 그만 헤어지죠. 책은 제가 선물로 드릴 테니 가져가세요. 저는 또 구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나는 도서관을 나와 곧장 차를 몰아 반구대 암각화로 갔다. 상징적인 사막이기는 했지만 20년 전의 그 사막을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겨울인데다 주중이어서 반구대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른 나뭇잎이 구르는 반구대 가는 길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차를 ‘암각화 그림속으로’ 식당 앞에 주차시키고 곧장 암각화로 걸어갔다. 겨울인데도 사연댐의 수위는 제법 높았다. 예전에 사막을 연출했던 바닥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물이 찼을 때와 갈수기의 차이는 엄청났다. 마른 먼지바람이 이는 사막이 푸른 창해로 바뀌는 것이었다. 가득 불어난 물 건너편의 암각화는 존재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문양을 관찰할 수 있도록 망원경을 설치해 놓았는데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예전에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밤중에도 찾아와 바지를 걷어 올리고 암각화 앞으로 달려갔던 때가 생각났다. 지금은 그때처럼 바지만 걷어 올린다고 물을 건널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건너편 바위벽에 새겨져 있는 여인상이 떠올랐다. K의 설명대로라면 고래잡이를 떠난 선장의 마누라였다. 그의 시에도 나오는 걸 보면 장난으로 했던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파리한 얼굴에 움푹 들어간 볼우물을 그리워하듯 그에게도 그런 무엇이 필요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의 주장처럼 진짜 고래잡이를 떠난 선장의 마누라인지는 몰라도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그림 하나가 그토록 시인의 가슴을 들뜨게 하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신열이 나게 하는 파리한 얼굴과 깊은 볼우물은 나에게 무엇일까? 그러고 보니 난 아직까지 그녀의 이름조차 알고 있지 못했다.

나는 나무로 막아놓은 목책에 기대어 미래시학을 펼쳤다. 다시 그녀의 사진이 나온 페이지를 폈다. 도서관 실내에서 보았던 사진의 이미지와 햇볕 아래서 보는 사진은 분위기가 달랐다. 실내에서 보는 사진은 몽롱한 환상적인 분위기였는데 밝은 빛에 노출된 사진은 좀 더 사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이가 들어 보이기도 하고 아무데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여인의 모습 같기도 했다.

사진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아까 도서관에서 읽다 접은 페이지를 펼쳤다.

아침식탁에 앉아 편안한 자세로 음식을 먹고 있는 그에게 내가 물어 볼 것이다. 사막에서 찾으려던 것은 찾았느냐고? 그러면 그가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을 것이다. 나는 놀이터에서 돌아온 어린아이를 바라보듯 그를 뚫어져라 바라볼 것이다. 그러나 이 아무렇지도 않고 어려울 것 같지도 않은 현실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