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도시 첨병- 울산문화예술인]“창작공모사업 활성화·뮤지컬 학과 필요”
2024-08-19 권지혜 기자
◇40년간 작품 80여편 연출
지난 15일 찾은 울산 북구 송정동 박상진 의사 생가. 박용하 연출가는 제79주년 광복절을 기념해 박상진 의사 생가에서 열리는 실경뮤지컬 ‘박상진’ 공연 준비에 한창이었다. 배우들을 진두지휘하는 박 연출가의 모습에서 연륜이 느껴졌다.
오후 7시30분 박상진 의사 생가에는 실경뮤지컬 ‘박상진’을 보러 온 시민들로 북적였다. 박 연출가가 울산 출신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의 일생을 소개한 후 공연이 시작됐다.
박상진 의사의 치열한 독립운동으로 분위기가 고조된 순간 박 연출가가 컷을 외치고 무대에 등장했다. 현실과 극이 오고가는 연출로 자칫 무겁거나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공연이 재밌게 느껴졌다. 박 연출가가 직접 극 속 예술감독 역할을 맡아 현실감이 높였다.
특히 시민들이 공연에 직접 참여할 수 있어 호응이 좋았다. 시민들은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공연에 녹아들었다.
박상진 의사가 일본 경찰과 대립하는 장면과 사형 당하기 전 애국가를 부르는 장면은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 시민들은 애국가를 따라 부르거나 태극기를 흔들며 공연에 몰입했다.
공연이 끝나고 출연 배우들과 기념사진을 찍기 위한 긴 줄이 이어졌다.
박 연출가는 “박상진 의사는 신분, 재산, 목숨 등 모든걸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분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독립운동가들의 피와 땀에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고 공연하고 있다”며 “가장 울산적인 것이 가장 한국적이고 세계적이다. 울산의 잊혀진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퇴직 후 전문배우 길도 가고파”
박 연출가는 울산YMCA에서 처음으로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고등학교 재학시절 1983년 극단 태화에 막내 단원으로 입단했다. 처음에는 배우 역할만 하다가 선배들이 생활고 등 여러가지 힘든 상황들로 하나 둘 떠나면서 연출을 할 사람이 없어 자연스레 연출가를 맡게 됐다. 박 연출가도 공장 생활을 하며 연극 생활을 이어갔다.
박 연출가는 “1985년 극단 태화의 대표를 맡았으며 1986년에는 울산에서 최초로 연극 전용 소극장을 개관했다”며 “연극에 대한 전문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1989년 서울예술대에서 연출을 전공한 뒤 1992년 고향 울산에 내려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고향 울산에 내려왔을때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극단 태화는 거의 사라져가고 있었으며 1992년 대표를 맡은 극단 울산의 소극장 월세를 벌기 위해 지역 일간지에서 4년간 기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1998년부터 울산문화예술회관에서 예술감독으로 활동했다.
박 연출가는 “소극장에서 장기공연을 하기 위해 작가한테 작품을 의뢰하니 작가료가 월세보다 비쌌다. 작가료를 줄 돈이 없어 직접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며 “1992년 경남연극제에서 ‘장생포’란 작품으로 울산 최초로 희곡상을 수상했다”고 말했다.
박 연출가는 40년 동안 총 80여편을 연출했다. 그러나 울산에는 전문성 있는 스태프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전문 뮤지컬 배우가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울산에서 뮤지컬이 활성화되기 위해선 관내 대학에 뮤지컬 관련 학과가 있어야한다. 지금 울산에서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친구들은 다 서울로 간다”고 씁쓸해했다.
그러면서 그는 “울산이 문화도시가 위해선 예술가와 예술작품에 대한 창작 공모사업이 경상일보의 신춘문예 공모처럼 활성화돼야 한다”고 강조한 뒤 “(예술감독)퇴직 후에는 전문 배우의 길도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권지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