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강 상류 반고사서 사미승 생활한 원효의 발자취를 찾아]차이의 제자리 찾기로 화해와 소통 지향
부부나 가족이 파탄지경의 심각한 불화에 봉착할 때 시도하는 효과적인 치유법으로 역할극이 있다. 서로의 역할을 바꾸어서 해보는 역할극을 통해, 비난하고 미워했던 상대의 언행을 ‘발생시켰던 조건들과 그 인과관계’를 이해하게 되어 화해의 실마리를 확보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현대적 적용이다.
‘견해 차이’는 자연스럽고 불가피하다. 그러나 서로 다른 견해들이 배타적 다툼의 양상으로 나아가면 그 후유증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다. 언어인간은 견해를 자기 존재의 기반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언어인간의 배타적 견해 다툼이 집단화되면 그 해악성은 훨씬 치명적이다. 일상의 쟁론(諍論, 견해의 배타적 다툼)이나 정치·사회적 쟁론을 소화해 내는 방식과 수준은 개인과 사회의 역량과 수준을 판단하는 적절한 지표다. 한국 정치의 가장 큰 취약점도 ‘쟁론의 소화력’에 있다.
모든 주장·견해는, ‘선택한 조건들’과 ‘조건들의 인과적 연관’이 결합되어 그것을 수립하고 있다. ‘주장·견해와 유관하고 사실에 부합하는 조건들’을 ‘타당한 인과관계’ 혹은 ‘타당하지 않은 인과관계’로 엮어 수립한 주장·견해도 있고, ‘주장·견해와 무관하거나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조건들’을 그럴듯해 보이는 ‘사이비 인과관계’로 엮어 수립한 것도 있다. 따라서 어떤 견해나 주장을 이해하거나 평가할 때는 무엇보다 ‘선택한 조건들’과 ‘조건들의 인과적 연관’을 함께 살펴야 한다. 그럴 때 ‘주장·견해와 무관하거나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조건들’과 ‘사이비 인과관계’는 비판하여 수정을 요구할 수 있고, ‘주장·견해와 유관하고 사실에도 부합하는 조건들’과 ‘타당한 인과관계’는 긍정하여 수용할 수 있게 된다.
현실 세계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다면적으로 얽혀 있다. 따라서 구체적 사안에 대해 어떤 주장·견해라도 전면적 타당성을 지니기 어렵다. 어떤 주장·견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것을 발생시킨 조건들 및 그들의 인과관계에서 발생하는 ‘부분적 타당성과 가치’이다. 이것을 원효는 일리(一理)라 부른다. 이어서 필요한 것은, ‘부분적 타당성의 수용과 종합을 통해 더 좋은 견해로 나아가는 역동적 향상’이다. 원효가 말하는 통섭(通攝, 열림과 받아들임)에는 이런 의미가 내재한다. 일리(一理)들을 통섭시키면 화쟁(和諍, 배타적 주장의 화해와 수용)이 가능하다. 원효 화쟁 사상의 한 요목(要目)이다.
견해를 발생시킨 조건들과 그 인과관계에 내재한 ‘부분적 타당성과 가치’를 식별해 내게 하는 ‘사유의 방법’이 있다. 원효는 그것을 ‘문(門)의 구분’이라 부른다. 이때 ‘문(門)’이라는 말은 ‘주장·견해의 조건적 타당성을 성립시키는 인과계열’, 혹은 ‘견해가 속한 의미 맥락’을 지칭한다. 원효의 화쟁 논법에서는, 이러한 문(門)을 구분한 후 그에 의거하여 ‘부분적 타당성과 가치’(一理)를 포착하고 통섭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이 자주 등장한다. 다르거나 반대되는 견해들을 <저마다 일리가 있다.>라면서 포섭적으로 수용하는 원효의 화쟁 논법에는, ‘문(門)의 구분’이 전제되어 있다. 이 ‘문 구분의 사유 방식’은 붓다가 펼친 ‘연기적 사유 방식’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조건 인과적으로 수립된 것’으로 파악하는 연기적 사유의 원효적 재현이 바로 ‘문 구분의 사유 방식’이다.
합리적 통찰, 진실에 상응하는 견해 주장은 언제나 ‘조건적’이어야 한다. 자기 견해의 수립 조건들을 인과적으로 밝히는 ‘조건 인과적 진술’이어야 한다. <모든 현상을 조건에 의존하여 발생한 것으로 파악하라>는 붓다의 연기법은, 이런 점에서 근원적 ‘쟁론 치유력’을 지닌다. 주장의 무조건적·전면적·절대적 타당성을 주장하는 무지와 독단·독선, 그리고 그에 수반하는 폭력적 배타성은, ‘무조건적 주장’을 ‘조건적 주장’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치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붓다의 연기적 사유는 화쟁적 사유다.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울 뿐.>이라는 붓다의 말은 연기적 사유의 화쟁적 구현이다. 원효는 연기적 사유의 쟁론 치유력을 ‘문(門) 구분을 통한 화쟁’으로 계승하고 있다. ‘부분적 타당성(一理)의 변별과 수용’이라는 화쟁 원리는 연기적 사유의 원효적 계승이다. 붓다의 연기법을 화쟁 사상으로 계승하는 원효의 안목과 성취는 불교 사상사에 유례가 없다. 그만큼 독특하다.
원효의 화쟁 사상은 세 가지 축으로 수립되고 있다. 한 축은 ‘문 구분’이고, 다른 한 축은 ‘무(無)실체·무(無)본질·무(無)동일성·변화·관계의 세계를 드러내는 일심의 지평’이며, 나머지 한 축은 ‘본질·실체·동일성 관념에서 벗어나 언어를 사용하기’이다. 이 세 가지 원리는 서로 연결되어 통섭적(通攝的)으로 관계 맺는다. 어느 하나도 다른 두 원리에 기대어야 비로소 제 역할을 완전하게 수행할 수 있다. 세 축이 어울려 서로 힘을 보태면서, 상이한 견해들의 배타적 충돌을 ‘서로 통하고 서로 수용하는’ 통섭적(通攝的) 관계로 만들어 가는 것. - 이것이 원효의 화쟁 사상이다. 필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문(門) 구분을 통한 화쟁’이다. 현실성을 고려할 때, ‘문 구분을 통한 화쟁’을 중심축으로 삼는 것이 적절해 보이기 때문이다. ‘문 구분을 통한 화쟁’을 중앙에 두고, 다른 두 축을 양옆에 세운 후, 이 세 축이 서로 맞물려 힘을 보태면서 끝없이 상승해 가는 구도. - 이것이 원효가 펼친 화쟁의 길이다.
화쟁의 꽃이 피려면 쟁론 주체 쌍방의 ‘지속적 자기 개방’이 필요하다. 수행과도 같은 쌍방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화쟁의 정원에 향기가 가득해진다. 화쟁 사상은 인문학의 새로운 전망이기도 하다. ‘차이의 제자리 찾기를 통한 차이 화해와 소통’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견해를 발생시킨 조건들 및 그 인과관계에 내재한 부분적 타당성 및 가치’를 식별하여 포섭하려는 화쟁의 사유 방식은, 개인과 사회의 쟁론 상황에 전반적으로 유효하다.
일부만 전하는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은 원효가 오직 화쟁을 주제로 삼아 저술한 것이다. 그 독특함과 탁월함 때문에 동아시아 불교의 지성들은 경이의 찬사를 보내고 있다. 고려 의천은 원효에 대해 “온갖 배타적 주장들의 실마리를 화해시켜 일대의 지극히 공정한 이론을 얻었다.”라고 평가하였고, 고려 숙종 6년(1101)에는 원효에게 화쟁국사(和諍國師, 배타적 다툼을 화해시키는 나라의 스승)라는 시호가 추증되었으며, 명종(1170-1197) 때에는 경주 분황사에 화쟁국사비가 건립되어 조선시대 초기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서당화상비’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통하게 하고 화합하게 하여’(通融) 서술하고는 ‘십문화쟁론’이라고 이름하였다. 수많은 사람이 (이 책에) 동의하며 모두 <훌륭하다!>고 칭송하였다. …[당나라에 왔던 진나(陳那)의 문도가 ‘십문화쟁론’을 읽고는] 찬탄하여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십문화쟁론’을 범어로 번역하여 곧 (마멸)사람에게 부쳐 보냈으니, 이것은 [바로] 그 나라(천축) 삼장(三藏)법사가 [‘십문화쟁론’을] 보배처럼 귀하게 여기었던 까닭에서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글=박태원 울산대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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