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대왕암공원 구(舊) 방어진중학교 재생 방안
울산 동구 대왕암공원에서 슬도에 이르는 해파랑 8길은 전국에 자랑할 만한 아름다운 해변 길이다.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동해안의 해변 길, 숲길, 마을길로 이어지는 50개 코스, 750㎞ 길이의 해파랑길 중에서 이곳만큼 아름다운 풍광과 감동적인 서사(敍事)가 있는 곳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하늘을 가리는 웅장한 솔숲과 오랜 세월을 견뎌낸 대왕암의 굳센 기상을 체감하며 슬도로 향하는 해변 길에서 우리는 낡고 방치되었지만 범상치 않은 위엄을 지닌 공간을 만날 수 있다. 바로 구(舊) 방어진중학교다. 많은 사람이 울산교육연수원으로 기억하는 이곳의 장소성과 가치를 이해하려면 방어진중학교로 부르는 것이 더욱 적당하다.
방어진중학교의 전신은 고(故) 이종산 선생이 “나라를 부강의 반석 위에 올려 세우는 원동력은 오로지 청소년을 교육하는 데 있다”라는 신념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해 1947년에 설립한 방어진 수산중학교다. 이 학교는 1959년에 공립 방어진중학교로 전환되었다. 지금의 본관 건물은 1971년에 새롭게 건축되었지만, 50여 년의 짧지 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종산 선생 공덕비에는 ‘우리 조국이 광복하매 그 모은 토지 삼만 사천평과 돈 이백만원을 다 바쳐서 재단법인을 만들고 방어진중학교를 세워서 지방 청년의 진학의 길을 열었다.’라는 깊은 울림의 글이 남아있다. 해파랑길 어디에서도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겨있는 장소를 만날 수 없다.
대왕암공원을 거닐면 공간과 시간,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조화로움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울창하고 빼곡한 솔숲 사이에 조심스럽게 솟아 있는 울기등대는 딱 그만큼의 높이와 그만큼의 크기를 가지고 있어서 대왕암공원의 매력을 더 빛나게 하고 있다. 해변 길을 걷다 만나는 방어진중학교 건물 또한 울창한 소나무 군락을 압도하지 않는 조화로운 크기와 높이로 무심하게 서 있다. 개발과 자본이 넘쳐나는 이 시대의 어느 소나무 숲에서 이렇게 겸손하고 조화로운 인공의 건축물들을 만날 수 있을까!
방어진중학교 건물의 재생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건축 구조적 한계와 비용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건축 기술은 예상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장소의 가치를 생각하면 비용 또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특별한 장소에, 특별한 의미를 지닌 건축물을 보존하지 않는다면 울산의 역사는 그 깊이를 더 할 수가 없다.
방어진중학교를 재생하기 위해 반드시 지켜져야 할 두 가지 조건이 있다. 하나는 자신의 전 재산 어쩌면 자신의 삶을 바친 설립자의 ‘교육에 대한 열망과 가치’을 지켜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왕암공원이 가지고 있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온전히 유지하는 것이다. 지금과는 다른 유형의 크고 화려한 상업적 건축물이 들어선다면 대왕암공원의 가치와 매력은 훼손될 수밖에 없고 ‘이 장소가 가지고 있는 정신(Genius Loci)’ 또한 사라져 버릴 것이다.
독일 함부르크시의 이미지를 바꾼 엘프콘서트홀(Elbe Philharmonic Hall)은 공간 재생의 성공적인 사례로, 최고의 음향과 아름다운 연주홀 디자인으로 주목받는 건축물이다. 이 매력적인 건축물은 함부르크시 엘베강의 초입부에 있던 붉은벽돌로 건축된 대형 창고건물을 재개발한 것이다. 1966년에 지어진 이 대형창고는 1990년에 용도가 폐기된 채 방치된 것으로 건축적, 역사적 가치가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건축가 헤어초크앤드뫼롱(HdeM)은 기존 건물을 완전히 철거하지 않고 건물의 외피만 남겨두고 그 내부에 완벽하게 새로운 건축물을 세웠다. 기존의 무미건조하던 낡은 붉은벽돌은 상부에 새롭게 건축된 아름다운 푸른색 유리박스 형태의 외관과 대비를 이루는 매력적인 디자인 요소로 변신했고 그 장소가 가지고 있던 의미와 기억을 온전하고 특별하게 보존했다. 이 사례처럼 방어진중학교의 역사성을 나타내는 건축물 외관을 보존하면서 새로운 기능과 공간을 가진 건축물을 구현하는 것도 가능하다.
대왕암공원의 고유한 정신과 감동적인 헌신이 새겨져 있는 공간과 장소를 경제적 관점만으로 평가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는 아니다. 1962년 공업지구 지정 이후 울산은 새로운 것, 거대한 것에만 집중해 왔다. 이제 그리운 것, 소박한 것의 가치에도 관심과 투자가 필요한 때다. 남고 싶은 도시, 살고 싶은 도시를 위해 가야만 할 길이다.
이규백 울산대학교 교수 울산공간디자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