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붉은 도끼[103]]12부. 사랑은 어디에서 오나(5) - 글 : 김태환
어딘지 모르지만 차가운 바다에서 잡혀 온 랍스타 한 마리는 건강을 염려하는 한국의 늙은 부부 앞에서 온 몸이 부서졌다. 속에 감추어져 있던 속살은 회로도 나오고 찜으로도 나왔다. 나는 껍질을 부수고 속살을 몽땅 내보인 한 마리 랍스타처럼 내 안에 감추어져 있는 아프고 비밀스런 속살을 모두 꺼내놓고 싶었다.
식사가 모두 끝나고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마실 때였다. 아내가 냅킨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아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죽은 사람이 잠시 생각나서 그랬다고 했다. 아마 네 사람이 모여서 이런 자리에서 식사를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사막을 바라보고 있는 K의 아내를 생각했다. 김동휘. 20년 만에 알아낸 그녀의 이름이었다.
아내를 앞에 두고 다른 여인을 생각하다니 이 얼마나 사악한 짓인가? 더구나 죽음의 사자가 언제 데려갈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 나이에 가당키나 한 짓인지 모르겠다. 도대체 내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겠다. 수천 년 전에도 사람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는 붉은 돌도끼로 내 이마를 부수고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아내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이른 시간에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하루 쉬기는 했지만 그동안 누적된 피로 탓인지 성욕이 일지 않았다. 아내의 머리를 팔 위에 올려놓고 끌어안으니 만감이 교차했다. 아내에게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나와 만날 것인지 물었다. 유치한 질문이었지만 아내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생에도 부부였을까 물어보니 그것도 그랬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당신은 전혀 기억이 안 나세요? 나는 가끔씩 우리가 전생에도 부부가 아니었나하고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었는데.”
“에이.”
아내는 나의 반응이 못마땅한가 보았다. 현실에서의 부부는 전생에도 인연이었기 때문에 만나는 것이라고 억지를 부렸다. 아내의 주장대로라면 이렇게 내 머릿속을 흔들고 있는 현실 속의 다른 여인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아내를 안고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도 사막을 가로질러가 그녀가 있는 곳에 닿고 싶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훨씬 가벼운 기분으로 잠에서 깨었다. 오늘 하루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그동안 너무 밖으로 돌아다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 하루쯤은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김재성 노인의 기록물을 모두 복사했다. 원본과 붉은 도끼는 김인후에게 돌려 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우리말로 번역을 해놓았다. 한 번 읽어 보았기 때문에 번역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내는 일부러 밖에 나가지 않고 차를 끓여 내오며 하루 종일 내 옆에서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