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붉은 도끼[105]]12부. 사랑은 어디에서 오나(7) - 글 : 김태환
지도에 나타나 있는 좁은 포장도로의 이름은 고하길이었다. 길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골짜기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졌다.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에는 좁은 논조차도 없었다. 마지막 길이 끝긴 지점에 차를 세웠다. 아내와 나는 집에서 나설 때 예상을 하고 등산복 차림으로 준비를 하고 나왔다.
아내는 소설을 쓰는데 이런 것도 필요한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범죄 집단의 생태를 알아보기 위해 조직폭력단과 함께 생활했던 소설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내는 그것보다는 이게 훨씬 낫겠다며 입을 다물었다.
개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다 보니 제법 큰 바위벽이 나타났다. 7미터쯤 되는 바위벽 꼭대기에는 모자를 쓴 것처럼 바위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마을 사람이 부르는 이름이 있다면 분명 처마 바위나 갓 바위로 불릴 것 같았다.
바위 밑에는 아니나 다를까 돌로 단을 쌓고 촛불을 피운 흔적이 눈에 띄었다. 학자들이 반구대 암각화나 서석곡 서석문을 보고 종교의식을 치르던 장소라고 언급을 하는 이유를 잘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나는 바위벽을 세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무슨 문양이라도 나타날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기대했던 문양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하우 교수는 전화 통화에서 반구대 암각화의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암각화가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지 않고 콩을 그릇에 담아 놓은 것처럼 한군데 집중되어 있는 점이라고 했다. 그것은 암각화가 주는 의미가 굉장히 넓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새긴 문양이라고 하는 주장이 문장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바였다. 반구대나 서석곡처럼 바위로 둘러싸인 좁은 곳에서 많은 사람이 생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었다.
이하우 교수의 말은 서석곡의 문양보다는 반구대 암각화가 더 오래된 것이며 그림을 그린 사람은 이곳에서 가까운 연안에서 고래잡이를 하던 사람들이었고 이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동해를 중심으로 포경으로 살아가던 집단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꼭 이곳에 살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금의 일본열도나 러시아 극동지역까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 증거가 같은 시대의 암각화가 더 이상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런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고 했다. 그 후에 농경이 발달하면서 서석곡의 기하학문양이 나타나게 되고 그 문양이 경주로 포항으로 전해지게 된다고 했다.
갓바위의 벽면을 샅샅이 살펴보아도 문양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다음에는 개울 바닥으로 내려섰다. 바닥은 돌로 마루를 깔아놓은 것처럼 너럭바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20년 전에 반구대 가는 길목에서 공룡발자국을 발견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바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바닥은 오랜 물살에 수마되어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