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박물관 기증유물 들여다보기]조선 후기 봉수대 상황 보여줘
2024-10-24 차형석 기자
문서는 울산부사(蔚山府使)가 박춘복, 박명대 부자에게 주전봉수대 별장(別將)으로 임명한다는 차정첩(差定帖), 별장과 인근 동수(洞首)에게 근무를 철저히 하고 군포를 잘 징수하라는 전령문, 그리고 미포·정자 등 봉수대 인근 마을로부터 군량용으로 거둔 금전의 내역을 기록한 문서와 울산부에서 남목(주전)봉수대에 내려준 조총 등 무기와 종이로 만든 투구, 종이갑옷 등 개인 방호무구, 불을 피우는 재료, 불을 끄는데 쓰인 재료, 신호 수단으로 깃발, 작은 북, 솥 등 장비의 목록, 별장이 이를 점검하여 이상 유무를 보고한 문서들이 있다.
이 고문서를 통해 남목(주전)봉수대는 수령의 관할 아래에 있었고, 봉수군(烽燧軍)은 봉수를 담당하면서 유사시에는 적군을 맞아 싸우는 군사 역할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봉수군 역(役)은 봉수대 인근 주민들이 담당했고, 군량 등 운영 경비도 이들이 공동으로 부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고문서는 조선 후기 봉수대의 운영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주전봉수대는 남목봉화, 남목천봉수, 남옥봉수, 남목봉수 등 여러 이름이 있었으며, 현재는 행정구역에 의한 주전봉수대로 주로 불리고 있으나, 고문서명에 따라 남목봉수와 남목봉수 관련 고문서로 불러야 할 것이다.
봉수는 변방과 국경의 정세를 횃불과 연기로서 변방의 긴급한 군사 정보를 중앙에 알리는 군사 통신 제도이며, 봉수대는 봉화를 올릴 수 있게 높은 산봉우리에 설비해 놓은 군사 시설이다. 조선시대 봉수제는 노선상으로 기간 봉수인 직봉과 보조 봉수인 간봉으로 구별하기도 하고, 봉수대의 설치 지역과 기능에 따라 경봉수, 내지봉수, 연변봉수, 권설봉수로 구분된다.
밤에는 횃불로, 낮에서는 연기를 올려 위급한 상황을 서로 교신했다. 울산은 우리나라 동남단 바다에 접하고 있어 선사시대 이래로 늘 왜구가 출몰하는 군사 요충지였다. 지금의 울산 행정구역상으로 봉수는 8곳이 남아 있는데, 봉수의 수도 그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주전봉수대는 주전동 봉대산 정상 해발 192m에 위치하고 있으며, 울산시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주전봉수대는 복원 정비되어 있어 원래의 모습은 아니지만 주변이 잘 보존되고 있다.
김대성 울산박물관 전시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