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왜 아직도 ‘친일파’를 말하는가?

2024-10-25     경상일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글을 쓰지?’ 그것도 대개는 욕먹을 글을.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런 생각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30년 넘게 학생을 가르치면서 ‘왜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가르치고 있지?’라는 고민을 그림자처럼 달고 살았다. 그래도 양심은 조금 있었는지 아니면 면피용이었는지 솔직하게 고백하곤 했다. “내가 한 말에는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다.” “내 말 믿지 말고 참고만 해라.”

당시 가르치는 주된 목적은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답을 맞히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아가는 ‘순례길’을 안내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어떤 대상의 본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대상의 드러남을 추적하는 식이었다. 단답형 질문과 답에 익숙한 학생은 지루하고 따분해했다. 하지만 생각이 깊고 창의적인 학생은 사고를 비약하며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기도 했다. 사실 어떤 학습 내용이든 수용자의 관심과 지적 능력에 따라 그 효과가 다르기 마련이다. 가르치는 자의 지적 정도 자체는 결정적인 변수가 아닐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지 않다면 종교든 학문이든 오직 교조만 가르칠 자격을 가질 것이다.

요즘 세태를 두고 걱정들이 많다. 혹자는 세상이 온통 무거운 짐과 쓰라린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저기서 굴욕과 절망, 열등과 비하, 협박과 공포, 두려움과 분노, 거짓과 협잡, 뻔뻔함과 야비함…. 저주 섞인 악담이 배회한다. 야수가 먹이를 찾듯 희생양을 겨냥한 칼날이 정의로운 열정으로 위장되기도 한다. 희망의 메시지나 몸짓은 실종된 지 오래다. 생각이 다른 글은 그 진위나 가치를 따져보기는커녕 대개는 거부되거나 매도되기 일쑤다. 법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되면 법 뒤에 숨고, 법을 위반하는 것이 이로울 때는 위반한다. 마치 프로레슬링에서 관중이 ‘악한’이라 지목한 자들 마냥. ‘도둑이 매를 든다’라는 속담처럼 허물 있는 자가 되레 큰소리치고 그것을 두둔하는 것을 의리로 착각한다.

그런 병적인 현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여러 진단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 뿌리를 확인하기 어려운 어떤 종교적 죄(罪)나 사회적 배경을 밝히지 않은 철학적 무명(無明)을 들먹이는 것은 별 도움이 될성싶지 않다. 우리 사회를 각박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주범이 혹시 ‘식민지성’의 잔재가 아닐까? 프란츠 파농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에는 아둔한 자들이 너무 많다’. 주체성을 상실하고 타 종족과 동족에 의해 ‘교묘하게 세뇌당한 사람들’ 말이다. 물론 무작정 동족을 숭배하거나 혐오하는 것도 문제다. 동족 숭배가 진정한 애국일 수 없고 혐오한다고 새로운 종족으로 개조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인이 되고 싶은 자나 일본인을 증오하는 자 모두 민족적 자기분열의 반영일 수 있다. ‘친일파’ ‘뉴라이트’ ‘용산총독부’ ‘일본 밀정’ 등 살벌한 말들은 그런 정신적 상태의 최근 모습이 아닐까? 속상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필자가 글을 쓰는 이유는 여전히 민족의 심성에 똬리를 틀고서 가치와 태도를 조종하는 식민지성을 해체하고 시민 각자가 자기해방의 길을 모색하자는 데 있다.

사회 일각에는 2023년 1인당 국민총소득이 일본을 제쳤다면서 이제는 일본과 견줄만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 속내는 ‘과거를 묻지 말자’라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주일 한국대사가 ‘한일’을 ‘일한’으로, ‘한미일’을 ‘일미한’으로 순서를 바꿨다고 한다. 믿기 어려운 일이다. 엘리트 지식인의 무의식적 숭일(崇日) 의식의 반영이 아닐까? 저간 뉴라이트의 면면과 발언, 정부 기관 곳곳에서 그들의 지위를 보면서 든 느낌이다. 왜 그들에게서 정체성, 타율성, 그리고 일선 동조론을 동원하여 민족사를 왜곡한 식민사관의 잔상이 어른거릴까?

누가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반대하겠는가? 누가 서로 존중하고 함께 번영하는 길을 거부할까? 문제는 시대착오적이고 부도덕한 지배와 종속, 우등과 열등, 승리와 굴욕, 선생과 생도의 관계를 정당화하려는 ‘신친일파’의 수작이다. 식민지 시대의 역사를 ‘제거’하고 현대판 신화(神話)를 만들려는 모종의 시도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김정배 전 울산문화재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