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허수경 ‘저녁 스며드네’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물방울은 동그르 꽃 밑에 꽃 연한 살 밑에 먼 곳에서 벗들은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고 저녁 스며드네.
한때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 세상의 모든 주막이 일제히 문을 열어 마치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저녁을 거두어들이는 듯했는데.
지금 우리는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네 양념장 밑에 잦아든 살은 순하고 씹히는 풋고추는 섬덕섬덕하고 저녁 스며드네.
마음 동그라미 하나가 아주 어진 안개처럼 슬근슬근 저를 풀어놓는 것처럼 이제 우리를 풀어 스며드는 저녁을 그렇게 동그랗게 안아주는데.
어느 벗은 아들을 잃고 어느 벗은 집을 잃고 어느 벗은 다 잃고도 살아남아 고기를 굽네
불 옆에 앉아 젓가락으로 살점을 집어 불 위로 땀을 흘리며 올리네,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빛 아래 그렇게 그렇게 스며드는 저녁, 저녁 스며드네
하루의 고단함 위로해주는 저녁
스미다. 안으로 배어든다는 이 말은 저녁의 이미지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화선지에 먹물이 스미듯 어스름이 점점 짙어가면 빛은 잎 그늘에 숨고 꽃잎은 제 몸을 감싸며 오므리고, 사람들은 저녁을 먹기 위해 모여든다.
그러니까 저녁의 이미지는 흐린 안개 속의 가로등 빛 같은 것. 가로등의 가장자리는 안개 속에 섞이고 스며들어 희미해지고 중심은 화심인 양 밝아, 뭇 날것들은 빛을 향해 날아들고 우리도 그 빛을 표지판 삼아 걸음을 옮기지 않는가. 고기를 굽고 살점을 집으며 술이 한 순배 돌라치면, 하루의 고단함, 하루의 근심, 하루의 서러움은 저물녘에 이내가 풀리듯 슬금슬금 풀려, 세상은 한층 순하고, 어질고, 따스해 보인다.
함께 저녁을 먹을 땐, 침침한 빛 아래서 감자를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음식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위안을 주는지. 꼭꼭 씹을 때 입안 가득 느껴지는 풍미와 질감은 얼마나 든든한지. 그래서 집과 아들과 혹은 모든 것을 잃은 벗들도 음식을 나누며 음식이 주는 위안과 이웃이 주는 위안 속에서 그래도 살아가야 할 이유를 생각한다. 저녁, 스며드는 위안 속에서.
송은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