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김행숙 ‘반개(半個)’

2024-11-04     경상일보

그날 난간을 붙들고 있던 손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그리고 무엇인가 뭉텅 떨어져 나갔던 것입니다
반개는 반개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접시 위에 남아서 시간에 갈변되는 과일 조각은 사소한 흔적입니다
사과 반개에는 씨앗이 보입니다
쪼개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폭력적인 것입니다
씨앗은 죽은 사람의 홉뜬 눈동자처럼 보입니다
죽음이 눈을 감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삶은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겐 눈도 심장도 이빨을 파고드는 치통도 기다림도
깜박이는 것입니다
반개는 반개의 상처입니다
반개는 반개가 두들기고 두들기는 가슴,
반개는 반개의 존재 증명, 잊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기필코 기억해야

전쟁터에서 보낸 사진을 본다. 팔다리가 잘리거나 얼굴 한쪽에 붕대를 감은 사람들. 반쪽이 떨어져 나간 거다. 떨어진 반쪽은 어디로 갔을까. 남은 반쪽은 너덜거리는 상처를 어떻게 견딜까.

사과를 쪼개면 씨앗이 보인다. 쪼개지 않으면 보이지 않았을 씨앗. 씨앗은 말 그대로 씨앗, 혹은 삶의 중심, 혹은 어떤 일의 바탕, 혹은 아이들, 아이들, 아이들. 달콤한 살 속에서 깔깔거리며 세상에 나가길 기다리던 뭇 생명이다. 그것은 반쪽으로 쪼개져 폭력적인 세상에 드러남으로써 죽음에 노출된다. 까만 씨앗에서 시인은 ‘죽은 사람의 홉뜬 눈동자’를 본다. 다친 동생을 업고 맨발로 2㎞를 걸어온 가자지구의 소녀. 소녀와 다친 동생의 사이를 백린탄과 강철비가 가른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반개는 한때 그것이 온전한 모습이었음을 나타낸다. 지금 남아있는 반개는 사라진 반개의 다른 모습이다. 남아있는 반개는 사라진 반개가 존재했음을 되새기는 존재다. 부재의 존재 증명. 그리고 그 되새김은 끊임없이 되풀이되어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 반개가 반개(半開)하여 마침내 개화하도록. 세상이, 삶이 나아지도록. 송은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