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혁의 유유자적(6)]한글 도시 울산과 외솔 최현배

2024-11-12     경상일보

지난 10월9일은 제578돌 한글날이었다. 세상의 많은 문자 중에서 만든 사람, 시기와 목적이 분명한 것은 한글이 유일하다. 한글은 글자를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기에 과학적이고 초성, 중성 그리고 종성을 결합해 다양한 음을 표기할 수 있기에 체계적이고 효율적이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합리성, 과학성, 독창성 등을 기준으로 30개 문자에 대한 순위를 매겼는데 한글이 1위를 차지했다. 세종대왕은 ‘한자로는 백성들이 글로 의사소통을 하기 어렵기에 이를 안타깝게 여겨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글자를 만들었다’고 목적을 설명했다.

이같은 정신을 높이 기려서 유네스코는 1989년 한국정부의 지원으로 ‘세종대왕 문해상(UNESCO King Sejong Literacy Prize)’을 제정해 인류의 문맹률을 낮추는 데 기여한 단체나 개인을 매년 시상한다. 2023년 수상자로 핀란드, 파키스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세 단체가 선정돼 상금 2만달러와 상장을 받았다.

대표적 표의문자(表意文字)인 중국 한자문화권에서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 각국이 어떤 시도를 하고 있는지 보기로 하자. 중국은 글자 모양을 간략하게 변형한 간자체를 만들어 사용한다. 일본의 경우 명사는 한자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한자를 간단한 부호로 변형시킨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형용사, 동사 및 외래어 표기를 위해 보조적으로 사용한다.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시절에 로마자를 응용해 만든 베트남 문자를 사용하면서 한자를 완전히 폐기했다.

한국은 1948년 10월에 ‘한글전용에 관한법률’이 제정돼 공용 문서는 한글로 쓰고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게 했다. 2005년‘국어기본법’이 제정돼 공문서를 작성할 때 괄호 안에 한자나 외국 글자를 병기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중국, 일본, 베트남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한글의 장점은 확연히 드러나고 특히 디지털 기기를 통한 문자입력 등에서 월등히 효율적이다.

‘우천시에…’라는 표현을 이해 못해서 ‘우천시가 어딘가요?’라고 묻는다는 학부모의 문해력 수준을 교사들이 한탄한다고 한다. 그런데 ‘비가 올 때’라고 하면 간단히 해결될 것을 굳이 한자어를 고집하는 교사가 문제다. 요즘은 한자어보다는 외래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예를 들면 ‘팬데믹이 길어 지면서 코로나블루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언택트 문화와 웰니스…’라는 문장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다.

칠곡 할매같은 분들은 성인문해교육을 통해 겨우 한글을 깨쳤는데 이제는 일반사람들까지도 까막눈이 될 판이다.

울산 그 중에서도 중구를 ‘한글 도시’라고 하는 것은 ‘한글이 목숨’이라며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주창한 외솔 최현배 선생의 탄생지이기 때문이다. 병영성 북쪽에 ‘외솔둥근갈림길’이 있다. 내비게이션을 치다가 우연히 이것을 발견하고는 ‘로터리(Rotary)’라는 익숙한 외래어를 대체하는 너무도 아름다운 순우리말에 감탄했다. 기왕이면 울산의 주요 로터리인 공업탑로터리와 태화로터리를 포함해 일괄적으로 이렇게 바꾸자.(흔히 ‘로타리’라고 발음하는데 공식적인 지명 표기는 ‘로터리’임)

최근에 변경된 신복교차로는 신복갈림길로 하면 될 것이다. ‘둥근갈림길’이 길다면 요즘 젊은이들처럼 2자로 줄여서 ‘둥갈’이라면 근사하지 않는가?

근자에 지인이 너무 좋은 순우리말이라면서 ‘흔흔하다’는 말을 소개했다. 알고 보니 외솔 최현배 탄생 130주년 기념행사를 알리는 안내장과 깃발에 ‘흔흔한 날’이 제목으로 큼지막하게 표기돼 있다. 관계자에게 문의하니 ‘매우 기쁜날’이란다. 그런데 검색해 보면 ‘흔흔(欣欣: 기쁠 흔이란 한자가 반복돼 기쁨을 강조)’은 일상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한자어다. 한 블로거가 한자의 소리만 보고 순우리말로 착각해 인터넷에 소개한 것이 엉뚱하게 외솔 탄생 기념행사의 제목으로 채택된 것이다. 게다가 행사 안내장에는 ‘네컷’ ‘한글 쿠키’ ‘트레이너’ ‘뮤지컬’ ‘갈라쇼’등의 외래어가 분별없이 사용되고 있다. 자랑스러운 최현배 선생의 탄생지인 울산이 한글도시에 걸맞게 순우리말 사용에 본을 보여야 한다.

임진혁 유니스트 명예교수 전 울산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