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강연호 ‘단풍’
사랑은 맹목을 잃는 순간 사랑이 아니어서
붉은 잎 단풍 한 장이 가슴을 치네
그때 눈멀고 귀먹어
생각해보면 가슴이 제일 다치기 쉬운 곳이었지만
그래서 감추기 쉬운 곳이기도 했네
차마 할 말이 있기는 있어
언젠가 가장 붉은 혓바닥을 내밀었으나
그 혀에 아무 고백도 올려놓지 못했네
다시 보면 붉은 손가락인 듯
서늘한 빗질을 전한 적도 있으나
그 손바닥에 아무 약속도 적어주지 않았네
붉은 혀 붉은 손마다 뜨겁게 덴 자국이 있네
남몰래 다친 가슴에
쪼글쪼글 무말랭이 같은 서리가 앉네
감추면 결국 혼자 견뎌야 하는 법이지만
사랑은 맹목을 지나는 순간 깊어지는 것이어서
지그시 어금니를 깨무는 십일월이네
단풍에 빗댄 맹목적인 사랑
쓸쓸함이 물기처럼 배어나는 만추에는 단풍을 노래한 시들에 자주 눈이 간다.
두목의 ‘산행’이란 시에는 ‘서리 맞은 단풍이 이월 꽃보다 붉다(霜葉紅於二月花)’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음력으로 이월은 봄꽃이 다투어 피어나는 계절인데, 그 봄꽃보다 단풍이 붉다 하니 얼마나 곱게, 붉게 물든 단풍일까.
이 시에도 단풍이 불타오른다. 단풍을 표현한 붉은 혀, 붉은 손은 사랑에 대한 은유이다. 붉게, 뜨겁게 타오르는 만큼 맹목적인 사랑이다. 차마 고백하지 못하고 애를 끓이는 눈먼 사랑이다.
재채기와 사랑하는 마음은 감출 수 없다 하였으니 상대도 눈치를 챘으리라. 하지만 연모의 마음 부여잡고 끝내 혼자 견디는 사랑이다.
시인은 사랑은 맹목이고, 심지어 맹목이 아닌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모든 절정에는 소멸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속절없이, 대책 없이 붉게 타오르던 단풍에도 서리가 앉고 무말랭이처럼 오그라드는 때가 온다. 시인은 그때 오히려 사랑이 깊어진다 하였으니 역시, 사랑은 맹목이다. 이월 꽃보다 붉다.
송은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