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면주 칼럼]상투 잡힌 선량들
30여년 전 추억의 대형 세단인 ‘각 그랜저’가 전기차 모델로 출시된다고 한다. 검정색의 각(角)진 외관도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뒷 범퍼에 높게 올린 안테나와 실내에 장착된 이동 전화기는 경외심을 일으킬 정도였다. 당시만 해도 전화기는 거실 탁자에 고이 모셔두었는데, ‘각 그랜저’를 통해 이동 전화기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이후에 일명 ‘삐삐’라 불렸던 무선호출기에 이어 휴대폰이 등장했고, 여기다 인터넷 기능을 보탠 스마트폰이 대세를 이루게 됐다.
현대인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스마트 폰을 향해 고개를 숙여 경배하고 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절대적 지배자 ‘빅 부라더’의 현신이 스마트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 인공지능 기능을 탑재한다고 하니, 인류의 생활 양식이 어떻게 변화할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작금 유력 정치인들이 스마트폰의 녹음기능에 상투를 잡혀 쩔쩔매고 있다. 통신비밀보호법상 처벌 대상이 되는 녹음은 타인 간의 대화 내용이다. 본인이 대화의 당사자일 경우에는 상대방의 동의 없이 녹음해도 무방하다. 타인 간의 대화라 해도 대화 당사자 모두의 동의를 받은 경우는 불법이 아니다. 중요한 비즈니스에 관한 대화를 녹음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고, 자동으로 통화 내용 전부를 녹음하는 사람들도 많다. 범죄자가 자신도 모르게 자동녹음 기능이 작동해 대화 내용이 모두 녹음된 줄 모르고 극구 부인하다가, 수사관이 재생하는 자신의 생생한 목소리에 놀라 자빠지는 경우를 자주 본다.
창원지역 한 여론조사기관 여직원의 폭로로 시작된 이번 사태는 대통령 부부, 5선 국회의원 등과의 통화 내용이 폭로되고, 개혁 정치를 자처하는 이준석 의원 등이 사찰에서 새벽에 홍매화를 심는 모습이 공개되는 등 국민을 혼란스럽게 했다. 결국 명태균과 김영선이 구속됐지만, 파장의 끝이 여기서 멈출 것 같지는 않다.
박근혜 시절 김무성 당 대표의 ‘도장 들고 날으샤’ 장면, 지금의 유력 정치인이 일개 정치 거간꾼에게 상투를 잡힌 장면, 국회의원의 세비를 거간꾼과 반띵하는 장면 등은 보기에도 민망한 공천 커넥션의 민낯일 가능성이 크다. 각종 선거때만 되면 각 정당에서 공천위원회를 구성해 후보자를 공정하게 선정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당 대표 등 정치적 실력자들의 입김과 정치적 계산에 좌우됨을 부인할 수 없다. 이렇다 보니 당내 정치적 실력자들과 친분을 앞세운 정치 브로커들이 날뛰게 되고, 나름 난다긴다하는 출마자들이 동아줄을 잡기 위해 정치 거간꾼들에게 상투를 잡히는 민망한 모습이 끊임없이 연출되고 있다.
우리와 가장 유사한 선거제도를 가진 미국에서도 이 문제는 늘 골칫거리이다. 미국에서는 18세기 후반에는 후보를 코커스(caucas)나 당대회를 통해 선정했으나, 실상은 이익집단과 결탁한 당내 소수의 실력자에 의해 통제됐기 때문에 민주적이라 할 수 없었다. 지금의 우리와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보면 된다. 1903년 위스콘신주 의회가 의무적인 예비선거법을 제정해 예비선거를 통해 후보자를 선출하다가, 예비선거제의 확대 개념인 오픈 프라이머리(open primary) 제도를 점차 확산해 가는 추세에 있다. 이 제도는 공천과정에 일반 국민이 직접 참여해 결정권을 갖는 방식으로 장·단점이 있다. 분명한 것은 공직 후보자의 공천과정에 당내 소수의 정치적 실력자와 이익집단의 영향력을 줄여나가는 좀 더 민주적인 방향이라는 점이다.
선거철마다 전문가들이 공천 커넥션의 개혁을 요구하지만, 정치권은 그때마다 감언이설의 눈가림으로 피해 가더니, 이번 총선에는 양당 공히 소수 실력자의 입맛에 맞는 공천을 더 강화하는 추세를 보였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기성 정치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개혁을 주도해야 할 이준석 등 청년 정치인들이 이번 사태에 연루된 의혹으로 우리 정치의 미래를 암울하게 한다는 점이다. 결국 모두가 쉬쉬하던 일이 휴대폰의 녹음기능에 의해 폭로된 셈인데, 책임 전가나 정쟁의 소재만 삼을 일은 아니다. 이번 일의 결말은 국민 누구나가 쉽게 출마할 수 있는 예측 가능성, 투명성, 공정성을 갖춘 민주적인 공천 제도가 마련되는 전화위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신면주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