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철호의 울산 전란사(5)]서라벌 지킴이 방어진 산성
1.
방어진은 일찍부터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신라시대 때는 경주 지킴이 역할을 했으며, 고려와 조선시대 때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동해안을 따라 방어시설을 강화했을 때 방어체계의 중심지였다. 임진왜란 때는 왜인들이 군사기지로 삼았던 곳이다. 조선시대 때는 국가 경영의 목장이 설치되어 경상좌도 국방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남쪽의 가리산과 북쪽의 남목천봉수를 이어주는 천내봉수의 존재는 이 지역이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을 가능성을 열어둔다.
방어진은 그 이름에서부터 적의 침입을 막는다는 의미가 있다. 지금 방어진의 한자 표기는 ‘方魚津’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魴魚津’으로 나온다. 조선시대에 방어(魴魚)가 많이 잡히는 나루터라는 의미로 방어진(魴魚津)이라 불렀다. 조선 초기에 사복시 관할의 목장을 두고 방어진목장(魴魚津牧場)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대동여지도>에도 ‘방어진(魴魚津)’이라고 쓰여 있다. 방어진의 방어(魴魚)를 ‘방어(方魚)’로 바꾼 것은 일제강점기 초기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런데 조선시대 이전, 고려시대에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수로진으로 방어진(防禦陣)이라 하였다. ‘防禦陣→魴魚津→方魚津’으로 바뀌어 온 것이니 방어진의 본래 의미는 외부로부터 오는 적을 막아낸다는 데 있다.
2.
신라시대에 왜인들은 울산, 기장, 부산, 경주, 포항, 영덕 등지로 수시로 드나들었다. 왜인들은 가끔 상업의 목적으로 방문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침략자였다. 그들은 침략자로 돌변하여 서라벌 외곽의 동남해안을 노략질하였고, 심지어 서라벌까지 들어와 대치하기도 하고, 신라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기도 했다. <삼국사기>를 보면, 기원전부터 신라를 침략한 사례를 볼 수 있는데, AD 73년인 탈해왕 17년에 왜인들이 목출도(木出島)에 쳐들어와 신라의 각간(角干) 우오(羽烏)가 전사한 기록이 그 예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목출도는 지금의 대마도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이전 왜인들의 주 침입로는 서라벌의 동쪽 변경 지역이었는데, 대체로 경북 영덕에서부터 울산에 이르는 곳으로 파악된다. <삼국사기> 1권 지마왕 11년(112년) 4월의 기록에 ‘서울(서라벌) 사람들의 떠도는 말에, “왜의 군대가 대대적으로 쳐들어온다”라고 하여 산골짜기로 다투어 숨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왜인의 침략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유례왕 6년(287년) 5월에 왜병을 대비하여 배와 노를 수리하고 갑옷과 무기를 손질하기도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내물왕 38년(393년) 5월에는 왜인들이 서라벌까지 쳐들어와 5일 동안 금성을 포위한 사건까지 벌어졌다.
위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동해안을 통한 왜적의 침입을 빈번히 받았으며 그만큼 동해안의 방비는 신라에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신라는 동해 방어에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성덕왕 21년(722년) 모벌군(毛伐郡, 현재 외동읍 모화 일대)에 관문성을 쌓아 그들의 침입을 막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동해에서 서라벌로 들어오는 가장 큰길을 막는다는 역할에 치중한 것이기 때문에 동해로 뻗은 곳곳의 작은 골짜기를 통해 들어오는 적을 막아내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이를 극복하려고 했기 때문인지 울산에서부터 포항에 이르는 해안가 곳곳에는 신라성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3.
방어진산성에 관한 기록은 읍지와 지지서(地誌書) 등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포산(浦山)의 동쪽 지맥 끝자락인 해발 100m의 얕은 구릉 정상에 토성으로 남아있다. 구전에 따르면 이를 ‘신라성’이라 했는데, 현재는 명칭이 바뀌어 ‘시리성’ 또는 ‘시루성’으로 불리고 있으며, 학계는 방어진 일원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여 ‘방어진산성’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 남목마성의 감목관으로 있었던 홍세태가 지은 한시 ‘신라고성(新羅古城)’이 이를 증명한다.
푸른 풀은 봄이면 옛 목장에서 돋아나고 / 무너진 성 저녁별은 신라 왕을 조문하네 / 평원의 끝 구름 같은 모래밭을 바라보니 / 해거름에 아득한 말떼들이 바람결에 눈물짓네. (碧草春生古牧場 壞城殘日弔羅王 平原極目雲沙際 萬馬嘶風立杳茫)
이 시는 오래된 신라성이 마성 안에 있고, 바닷가 모래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려준다. 비록 무너져 있다고 하더라도 ‘시리성’의 이름으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은 옛사람들이 이 산성의 성격과 그 위치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1872년에 작성된 ‘울산목장지도’에는 목장을 둘러싼 성곽인 마성과는 별도로 ‘구산성(舊山城)’이라는 이름을 달아서 표기한 부분이 있는데, 현재의 방어진산성과 그 위치가 같고, 홍세태가 시에서 언급한 주변 경관과도 구도가 비슷하다. 이런 점에서 방어진산성은 ‘신라 때 쌓은 산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1918년에 제작된 지도에도 명확히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방어진산성 인근의 곳곳에 삼국~통일신라시대의 고분이 있다는 사실도 이 산성이 신라시대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울산의 방어진산성은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모포리의 뇌성산성과 경주시 감포읍 전촌리의 토성,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의 경주 하서지 목책 등과 더불어 왜적의 침입에 대비한 대표적인 신라성이다. 특히 방어진 산성은 미포만과 일산진으로부터 울산만의 안쪽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요충지의 성격이 매우 강하다. 신라는 동해안의 방어를 위해 거점형 성곽을 해안 곳곳에 일정 간격으로 배치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방어진 산성인 것이다.
송철호 한국지역문화연구원장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