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작은 행복
우리의 일상은 매일 사람들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아등바등했던 지난날들을 뒤로 한 채 이젠 숨을 돌릴 수 있는 나이 때가 되었다. 회상해보면 낯 뜨겁고, 아찔했던 순간들도 참 많았다. 정년이라는 고비를 넘겼다는데 많은 위안을 삼기도 한다. 한 직장에서 삼십여 년을 근무했다는 것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다 겪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기쁨 보다는 슬픔이 훨씬 많았고, 행복보단 불행이 더 많았었다. 흔히들 “행복하세요”라는 인사말을 많이 한다. 지나고 보니 잔잔한 작은 행복들의 여운이 더 오래가는 것 같다. 정년 후 운 좋게도 아주 성실한 분을 만났다.
강한 신뢰를 바탕으로 평생 부동산업에 종사 하면서 겸손의 미덕까지 갖춘 분이시라 내겐 늘 존경의 대상이었다. 가끔 한잔 씩 하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는 부동산업을 하면서도 ‘공인중개사자격증’이 없어서 보조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당시 명문고 출신에 대학까지 나온 수재였는데, 매번 노력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해 포기단계에 있는 것 같았다.
부동산업 잔무를 보면서도 새벽마다 직접 지은 농산물을 지역로컬 푸드에 납품까지 하다 보니 공부에 전념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았다.
필자는 3년 전 내가 성공한 공부 방법을 제시했다. 수도 없이 들었든 학원 동영상은 이젠 그만 보고, 십 년치 기출 문제지를 열부씩 복사하여 준비하라고 했다. 줄을 쳐가며 수십 번 반복적으로 풀어보고, 해답 설명지도 이해될 때까지 보아야 한다고 했다. 즉, 기출문제집 풀이에 올인하라고 했다. 이게 통했는지 일년 후 1차 시험에 합격했다. 1차 통과하면 대체로 실무(보조)경험이 있는 분들은 2차는 탄력이 붙기 마련이다. 나는 끝까지 다음연도 2차시험 보는 날까지 끈을 놓지 않았다.
지난 10월 마지막 토요일 2차 시험을 보았고, 가 채점 결과 몇 개의 여유가 있다며 문자가 왔다. 내 절친을 통해서도 이번엔 가능성이 있겠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드디어 최종발표 D데이 11월27일 9시가 막 지나자 휴대폰 벨이 울렸고, 그 친구 이름이 떴다.
첫 마디가 “나의 은인입니다. 덕분에 합격했다고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는 평소 산을 좋아하기에 지금, ‘안나푸르나 트레킹’중인데 가족에게 연락받고 맨 먼저 기쁜 소식을 내게 전한다고 했다. 내겐 있으나 마나 한 자격증이지만 그분에게는 꼭 필요했다. 진정성 있는 고마운 인사말을 듣고 보니 마치 내가 해내었다는 듯 가슴 벅찼다. 또 다른 일화를 얘기할까 한다.
공무원 초창기 동행정복지센터 서기 때다. 지금은 기초수급자로 불리지만 그때엔 거택보호자라고 했다. 할머니 한 분이 매달 쌀 타러 올 때 마다 하소연을 했다. 친정 오빠 부부랑 함께 사는데 올케 구박이 심하여 양로원(요즘 전문요양원)에 가야겠다는 말을 종종 늘어놓곤 했다.
“할머니는 양로원 갈 수 있는 조건은 되는데요. 거기 가면 좋은 점도 많지만, 같은 시간대에 일어나야 하고, 밥도 함께 먹어야 하고요, 외출도 맘대로 할 수가 없어요. 아직 할머니는 건사하니 양로원보다는 지금처럼 이웃사람들 만나며 참고 사는 게 더 낮지 않을까요” 라고 했더니, 내 손을 꼭 잡고 젊은 사람이 말이라도 고맙다는 말을 남기곤 했다. 사십여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머리에 쌀을 이고, 돌아가던 할머니의 뒤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큰 행복이란 처음 집을 사거나, 공무원시험 합격했을 때 기쁨과 환희는 그때뿐! 오랫동안 은은히 이어지는 행복은 아닌 것 같다. 상대에게 심적 도움을 준다. 이는 생각 여하에 따라 아주 미미할 뿐이다. 오늘 아침! 잊지 않고 진정으로 고맙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흔치 않다. 내 주변에 이런 친구가 있어 잔잔한 행복감에 젖어본다.
강걸수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