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분옥 시조시인의 시조 美學과 절제](45)눈맞아 휘어진 대를-원천석(1330~?)

2024-11-29     차형석 기자

두 왕조는 섬기지 않겠다는 충절

눈맞아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던고
굽을 절(節)이면 눈 속에 푸를소냐
아마도 세한고절(歲寒高節)은 너 뿐인가 하노라 <청구영언>

 

때아닌 첫눈에 폭설이라니 이 남쪽 나라에선 먼 나라 이야기 같다. 아마도 최근 2~3년간, 눈 구경도 못해 본 겨울이었다. 도무지 눈을 맞아 본 지도 오래다. 전국은 눈 소식으로 가득한데 눈 소식이 전혀 없는 남쪽 나라 울산이다.

죽절성(竹切聲)을 들어본 적이 있다. 한겨울 대숲에 폭설이 내리면 대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어지다 못해 터진다. 우레같은 소리를 내며 꺾인다기보다는 대나무 속살 터지는 소리가 눈 오는 밤의 적막을 깨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뚝뚝 신음하다 툭하고 터지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깨기도 했으니까. 겨울밤 눈을 인 대나무가 부러졌으면 부러질지언정 굽지는 않은 것이다.

태종 이방원 자신을 가르친 늙은 신하 원천석을 태종이 즉위한 다음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를 섬기던 신하는 조선의 새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자신을 대나무와 같은 절개로 노래한 시조이다.

눈을 맞아 휘어진 대나무를 누가 굽었다 하느냐, 대나무가 굽을 것 같으면 눈 속에서 푸르겠느냐, 아무렴 찬 겨울에도 높은 절개를 지키는 것은 대나무뿐인가 하노라.

원천석 노 신하는 고려 말 충신이었다. 조선 왕조가 개국하자 치악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다고 한다.

부귀와 권력을 좇아 절개나 신의를 헌 신짝처럼 던지고 정치생명을 연장하는 이들, 의가 아니면 좇지를 말고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아야 할 지조는 어디 두고 ‘조변석개’ 하는 정치인이나, 쉽게 가정을 버리는 아녀자나 뭐가 다를 바 있는가.

백마 탄 왕자가 어디 있으며 새로운 혁명의 공화국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룻밤 자고 나면 말 바꾸기를 일삼는 정치인들에 멀미를 낸지 오래다.

1등 국민 앞에 3류 정치인들의 모습을 국민들은 웃고 있다. 이 시대에도 충과 절을 생명보다 아끼는 원천석 같은 정치인이 그립다.    한분옥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