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김창균 ‘녹슨 지붕에 앉아…’

2024-12-02     경상일보

이렇게 세월이 한 곳으로만 몰려가는 법도 있구나.
유난히 녹이 많이 슨 함석지붕에 앉아
늦가을 들판을 본다.
어느 먼 옛날에 한 목수가 지붕을 못질할 때
못질한 부분의 상처가 이렇게 덧날 줄 알았을까.
밤이 되면서 이 상처 속으로 별들이 들어가고
가끔 빗물이 스며들어, 이윽고
사람 떠난 구들장 위엔 꽃들이 조그만 얼굴을
내민다.



오래된 상처도 시간 흐르면 자연히 아물어

김연수의 소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는 남녀 주인공이 함석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장면이 나온다. 함께 살게 되는 사월에는 미, 이별을 고하는 칠월에는 솔. 그렇다면 이 시에서처럼 늦가을, 그러니까 11월쯤 함석지붕에서 듣는 빗소리는 어떤 음계일까.

아니, 그전에, 녹슨 지붕에 앉아 빗소리를 듣다니 이 무슨 청승인가. 하지만 빈 들판에 추적추적 비 내리는 늦가을의 막막함은 이런 청승을 떨게 할 수도 있겠다. 더구나 그 집은 오래전에 사람이 떠난 빈집이고, 녹슨 함석지붕은 이제 못이 빠져 그 자리로 빗물이 흘러들어 구들장 위엔 꽃까지 피었다.

먼 들판을 바라보던 시인의 시선은 지붕의 못 자리를 향하다 더 아래로 내려가 구들장의 꽃으로 간다. 아마 못 자리 구멍을 통해 바라보는 꽃일 것이다. 상처를 지나야 꽃이 핀다. 서서히 덧나며 터져 나온 상처는 별과 빗물을 받아들여 서서히 꽃으로 아문다. 상처가 꽃이 되려면 ‘이윽고’란 시간이 걸리는 법. 사람이 떠난 자리엔 이윽고 자연이 수줍게 고개를 내미니, 녹슨 함석지붕 위에서 듣는 늦가을 빗소리의 음계는 아마 ‘시’가 아닐까. 시(詩).

송은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