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성제의 독서공방]사유의 즙을 흘리는 단어들
침샘이 찔린 듯하다. 즙이 줄줄 흐르는 과일, 복숭아를 베어 문 듯하다. 단어에 대한 허기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한 입 베어 물 때 소매를 적시고 가슴팍을 찐득하니 적셔놓는 복숭아 즙처럼 단어 하나하나에서 작가의 사유가 흘러내린다. 왜 신은 시인에게만 이런 한여름의 농익은 복숭아를 허락했을까.
평범하게 쓰이는 단어들은 아니다. 적산온도, 주악, 삽수, 탕종, 파밍, 네온, 시드볼트, 페어리 서클 등등. 풀어놓은 45개 단어에서 단내가 진동한다. 쌉싸름한 커피 속에 깃든 다크초코 맛처럼 시인이 들춰낸 쓴맛의 단어들 속에서도 다크초코 맛이 감돈다.
단어에는 그 단어를 부리는 자만의 물상과 경험과 환상과 상상이 들어있다. 이들을 하나씩 찾아 불러내기만 해도 복숭아는 저절로 쪼개져 단어의 씨앗들을 툭툭 뱉어낸다. 씨앗에서 깨어난 새들이 노래하며 날아다닌다. 밖으로 날아오른 새는 허공에서 자란다. 다른 종류의 새로 변신하는 반전쯤이야 언어의 마술사들에겐 장난인가 보다.
젊은 언어의 마술사, 시인 안희연은 “언뜻 보아 말의 뜻을 가늠하기 힘든 단어들, 새롭되 분명한 단어들을 골라봤다”고 말한다. 안희연의 <단어의 집>(한겨레출판)에 들어갔다가 수풀로, 지푸라기로, 진흙으로 감싸진 새롭지 않은, 분명하지 못한 나의 단어들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들을 꺼내어서라도 쥐어짜본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응고 직전의 사유가 석회질 같다.
시인의 달디달며 또 한편 너무나 해맑은 강물 같은 사유세계를 나의 경험과 추억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다. 그리하여 혹시 내 안에도 숨어있을지 모르는 생경한 단어들을 찾아내 시인의 세계로 건너가보고 싶다.
시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시인이 고백한 ‘단어 생활자’이다. 이제부터라도 습관적이고 일상적인 단어의 틀을 넘어 새롭고 낯선 단어들을 찾아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을 새 마음으로 해보고 싶다. 나의 단어들도 사유의 즙으로 흘러 누군가의 새로운 단어들을 깨울 수 있을까. 즙이 줄줄 흐르는 복숭아가 될 수 있으려나.
설성제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