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12월에 다시 생각하는 문학과 인생

2024-12-18     경상일보

연말이 되니 여기저기서 출판 기념회와 문학 시상식이 많이 열리고 있다. 한 해가 다 가기 전에 창작활동의 결실을 책으로 발간해 두려는 작가들의 분주함으로 인쇄·출판량도 폭주하고 있는 것 같다.

필자도 이번에 몇 군데 출판식에 참석한 바 있다. 문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 문인들의 작품집 발간을 축하하고 문향(文香)을 느끼기 위해 행사장에 꽤 붐볐다.

얼마 전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한층 문학의 주가가 오르고, 독서에 관심이 높아진 연유도 분명 있을 것이다.

‘문학’의 ‘文’은 ‘글월’을 뜻하지만, 이것은 ‘무늬(紋)’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 무늬에는 삶의 모습이나 생각, 향기가 녹아 있다. 말하자면 문학은 언어를 통해 인간 삶의 희로애락과 삼라만상의 총체적 모습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김현 문학평론가는 평론집 <한국 문학의 위상>에서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는 전제 아래, 문학은 배고픈 사람 하나도 구하지 못하며, 권력에의 지름길도 아니지만 이런 ‘써먹지 못함’으로 인해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동시에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그의 이 언술은 ‘쓸모없는’ 문학이 도리어 ‘쓸모 있는’ 효용이 있다는 역설적 의미로 널리 인용되고 있다.

시대마다 약간씩 그 정의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문학은 언어를 매개로 하여 당대의 현실과 사람살이의 모습을 담아낸다.

돈이 되지는 않지만, 문학은 시대상을 반영하고 작가의 인생관과 철학을 드러냄으로써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삶의 진실(truth)에 대해 말하려 애쓴다.

그중에서 소설은 작가가 가공의 서술적 화자를 설정하여 전개하는 ‘꾸며낸 이야기’, 즉 ‘허구(虛構, Fiction)’이다. 여기서 꾸며낸다는 것은 사실(fact)이 아니라는 말이지, 거짓(lie)이라는 뜻이 아니다.

비근한 예로 전광용의 ‘꺼삐딴 리’나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어보면 안다. 소설가는 자신이 체험한 현실을 바탕으로 개연성(蓋然性, probability)을 부여해 스토리를 재구성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자 한다.

소설에 비하면 수필은 작가의 생각이 비교적 직접 드러나는 문학이다. 타 장르와 달리 수필 속의 ‘나’는 수필가 자신이다. 따라서 수필은 픽션보다 다큐에 가깝다. 여기에 등장하는 작가적 현실은 글쓴이가 체험한 ‘사실’이며 그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중심 생각은 바로 수필가의 세계관이다.

수필 작품의 백미(白眉)로 추앙받는 피천득의 ‘인연’은 그가 열일곱 살부터 겪은 특정한 경험을 담담하게 서술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인연의 의미와 가치를 제시한다. 불후의 명작 ‘인연’은 이런 결말을 남긴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朝子)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다시 만들고 싶은 인연을 갈구하고 만나고 싶지 않은 인연을 회피하고자 한다. 만나기 싫어도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되는 것도 인연이요,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는 것도 인연이지만, 그것은 사람이든 시대든 인간에게 처한 모든 상황에 다 적용된다.

글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갑진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2024년의 겨울이 깊어가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동지(冬至)가 가까워지고 있다. 긴 어둠의 터널 끝에는 반드시 밝음이 있음을 믿는다.

그리고 문인들은 내년에도 좀 더 진전된 삶의 철학을 펼치기 위해 펜을 바투 잡을 것이다.

권영해 시인·전 울산문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