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카피를 넘어 참조적 미래를 계획하자
2024년이 저물어가는 지금, 우리는 또 한 해를 정리하며 신년을 계획한다. 이맘때면 필자는 습관처럼 어느 노래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한 해의 성과와 실패를 돌아보고 다음 해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을 준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어제를 통해 배우고 오늘을 살며 내일을 희망하라’와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자인 존 듀이(John Dewey)의 ‘우리는 경험 자체가 아니라 그 경험을 돌아보는 태도에서 참된 배움을 얻는다.’라는 말도 이 시기에 더욱 크게 와닿는다. 이맘때면 우리는 일상에서 마주한 수많은 경험을 되짚어 후회와 행복을 찾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일을 거듭한다.
이러한 성찰은 건축과 디자인 분야에도 적용된다. 특히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창의적인 구상을 할 때, 자칫 실수하기 쉬운 개념이 있다. 카피(copy)와 참조(reference)의 차이다. 디자인계에서 독창성은 생명과 같아 무단 복제를 절대 금기한다. 하나의 아이디어가 무분별하게 복제되면 시장이 획일화되고, 창의성은 바닥을 드러내기 쉽다. 반면 건축에서는 역사적 건축 양식이나 도시 맥락을 참조해 재해석하는 전통이 오랫동안 비교적 관대하게 받아들여졌다. 건축물이란 시대와 역사적 경험 속에서 자연스레 반복·발전해 온 예술 형태이며, ‘정당한 간접적 인용’을 통해 도시 건축과 문화적 정체성을 이어 왔다.
오래된 거리나 문화유산을 무턱대고 파괴하거나 외형만 복사해 붙여놓으면, 그곳만의 고유 정체성은 쉽게 소멸한다. ‘카피’가 쉽게 끝나는 반복이라면, ‘참조’는 역사적 맥락을 재조명해 지속가능한 창조적 발전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필자가 디자인과 건축을 함께 공부하며 얻은 가장 중요한 깨달음도 바로 이것이다. 두 분야 모두 과거를 참고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접근법은 확연히 다르다. 디자인계의 ‘카피 금지’는 독창성을 수호하기 위한 장치이고, 건축계의 ‘레퍼런스 용인’은 지역과 역사의 흐름을 계승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책임 있는 태도’와 ‘의미 있는 참조’가 전제되지 않으면 무분별한 모방과 소비만 남는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애플(Apple)과 브라운(Braun)이 있다. 애플은 브라운의 미니멀리즘과 핵심 콘셉트를 적극 수용하되, 자사만의 사용자 경험(UX)과 현대적 감성을 결합해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 언어를 만들어냈다. 반면 브라운 제품을 형식만 모방하거나, 애플 제품의 외형을 무단 복제해 ‘짝퉁’ 아이폰을 만든 사례는 ‘카피’에 그치고 말았다.
건축 분야에서도 유명 건축가인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설계한 건축을 무단으로 복제한 사례가 보도된 적이 있다. 원 건물이 완공되기 전, 비슷한 디자인의 ‘복제품’이 먼저 지어져 버린 사건은 대중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처럼 아무런 맥락적·기능적 이해 없이 형태만 베끼는 것은 카피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디자인의 건물이라도 도시와 문화의 맥락을 이해해 창의적으로 계승했느냐, 아니면 표면적 복제를 했느냐에 따라 평가가 극명히 갈린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과거 경험이나 성과를 단순 복제하는 ‘카피’가 아닌, 의미 있는 ‘참조’를 통해 재해석하고 확장할 때 미래 또한 올바른 경험을 토대로 더욱 풍요롭게 설계된다는 점이다. 종종 과거 성취나 실패를 지우려 하거나 선언적 목표만 내세우는 것으로는 실질적인 변화를 끌어내기 어렵다. 과거에서 진정한 교훈을 찾지 못하고 겉모습만 베끼면, 결국 ‘카피’에 머무르는 무모함을 피할 길이 없다. 2024년이 남긴 다양한 경험과 교훈을 곱씹으며 단순히 복제하는 ‘카피’가 아니라 올바른 재해석을 통한 ‘참조’를 시도한다면 우리의 디자인과 건축은 훨씬 더 다채롭고 풍요롭게 확장될 것이다. 그리고 2025년에는 한층 더 행복한 경험과 창의적인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김범관 울산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