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민의 불역유행(不易流行)(19)]젊은이들이여, 인생을 즐기려면 이렇게!
12월 초 어느 화창한 날 오후,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입력이 안 된 번호여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왠지 받아야 할 것만 같았다. “박철민 교수님이십니까?” 호감이 가는 중년 남성의 맑은 목소리에 일단 정크 통화는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분은 필자의 수필집 <외교관은 나의 인생>을 막 읽고 저자를 만나고 싶어서 출판사 측과 접촉해 연락처를 얻었다고 했다.
자신이 평소에 독서를 좋아하고, 현역 복무 중이며 미래 외교관을 꿈꾸는 아들에게 보내줄 책을 찾다가 인터넷 서점을 통해 구매해 단숨에 일독했다고 했다. 덕담으로 시작한 통화는 40여분 이어졌고 격려 수준을 넘어 두 사람의 인생사 일부분을 공유하기까지 했다. 통화하는 동안 마치 아이돌 스타가 된 듯한 들뜸도 살짝 일었다. 그분은 가까운 날짜에 아들의 휴가가 시작되면 울산을 찾겠다고 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부산이 고향이고 현재 서울에 거주하면서 대구에서 육군 상병으로 근무하는 아들을 픽업해 전 가족이 함께 왔다고 했다.
중구 문화의 거리에 위치한 저자의 사무실 ‘ART EMBASSY’에서의 두 시간 걸친 북 토크는 진지하면서도 열띤 분위기였다. 외교관의 삶을 선택한 배경, 외교관 직업에 대해 궁금했던 점, 포르투갈과 헝가리 대사시절의 무용담, 유엔 등 다자외교 무대에서의 활약상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2008년부터 2년간의 모스크바 근무 시절 이야기인 ‘모스크바에 보드카는 있고 마네킹은 없더라’, ‘기후변화의 수혜자 러시아의 유기견’, ‘자랑스러운 고려인들’, ‘다드나 마법을 부르는 러시아 외교관’을 포함하여 ‘메드베데프와 푸틴, 발걸음이 닮았다’에 대해서도 질문이 이어졌다.
대통령 외교정책 비서관 시절의 일화인 ‘상춘재 마지막 승지라는 자부심’, ‘참으로 많은 일이 일어난 2019년 청와대’와 ‘전화 외교의 굴곡과 한일 관계의 어려웠던 길목’에 대해선 숨겨진 뒷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밝히면 재미있는 에피소드임에 틀림없지만, 대한민국판 구중궁궐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진실과 오해의 실체를 공무원 신분으로 함부로 공개할 수 없음에 대해 다시금 양해를 구했다. 30년 후쯤 비밀 공개가 가능한 시점까지 기다려 달라는 우스개 곁든 부탁도 하였다.
만남 시간이 끝날 때쯤 누구도 묻지 않았지만, 책의 마지막 이야기인 ‘젊은이들이여, 인생을 즐기려면 이렇게!’에서 언급된 몇 개의 내용을 끄집어내었다. 불혹을 지나면서 책을 읽다 기억하고 싶은 문구가 보이면 적어 두었다가 꺼내 읽곤 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일이 너무 잘 풀려서 이게 꿈인가 할 때도 있고, 위기에 봉착하여 좌절감을 느낄 때도 있다. 새로운 임무를 받았을 때, 조심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어떤 사람을 가깝게 만날 때도 있고, 실망감을 가진 채 헤어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적어 둔 노트를 꺼내 심호흡을 한번 한 후 읽고 생각하고 음미했다. 그러다 보면 슬픈 감정이 치유되기도 했고 이유없이 흥분했던 마음이 진정되기도 했다.
을사년 새해를 맞이하여 그런 문구들을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특히 많은 고민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 청년들의 마음에 와닿았으면 한다.
외롭고 힘들 때면 ‘Life is not always a smooth sailing’(인생이란 항상 순풍에 돛 단 듯 하지는 않지), ‘The difficult is what takes a little time. The impossible is what takes a little longer’(어려운 일은 시간이 좀 필요하고 불가능한 일은 시간이 좀 더 걸리고) 그리고 ‘Life is collection of moments. Good moments should be desirable, but bad one could be useful.’(인생은 매 순간의 모임이다. 나쁜 순간도 유용한 측면이 있다)을 떠올렸다.
교만한 마음이 생길 때면 ‘Overconfidence is our greatest enemy’(과신은 절대 금물이다), ‘The only place where success comes before work is a dictionary’(열심히 일하지 않고 성공을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Even though you are on the right track, you will get run over if you just sit there’(잘 되고 있다고 안주하고만 있으면 곧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로 겸손함을 유지했다.
예측하지 못한 위기에 봉착했을 땐 ‘The secret of business is to know something that nobody else knows’(비즈니스 성공의 비결은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아는 것),‘Try to be a contrarian. Be a subordinate who can deliver bad news and be a boss who values it’(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라. 나쁜 소식을 전달할 수 있는 부하가 되고 그 가치를 평가하는 상사가 되라)과 ‘Hindsight is always better than foresight.’(뒤늦은 깨달음이 통찰력보다 항상 낫다)로 힘을 얻었다.
그 외에도 ‘Men are moved by two levers only fear and self-interest’(인간을 움직이는 건 오직 두려움과 사리사욕이다),‘Beauty is in the eyes of the beholder’(아름다움이란 보는 사람의 생각에 달린 것), ‘Being unloved is nothing more than bad luck. But it is just bad luck not to love’(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한갓 불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않는 건 그냥 불운이다)로 위안을 얻었다.
마지막은 “누구 편을 들지 헷갈리면 그냥 친구 편을 들면 되지(If you do not know what to do, just support friends)”이다. 십수 년 전 직접 들은 고 키신저 국무장관의 지혜이다. 먼 길을 뚜벅뚜벅 함께 걷고 있기에 힘이 되는 친구라면 그냥 믿고 도와주라.
박철민 울산대 교수 전 울산시 국제관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