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철호의 울산 전란사(7)]관문성의 전초기지, 화산리 산성
울산에는 20여개의 산성이 남아있다. 이들 산성들은 대체로 규모가 크지 않은 테뫼식이다. 현재 울산에 남아있는 산성들은 대부분은 통일신라시대 때 동해안 일대에 자주 침입했던 왜구를 방비하거나 피난처의 역할을 했다. 왜구 침입의 주된 이유는 약탈이었으며 목적지는 신라 수도 경주였다.
왜구는 신라 건국 초기부터 빈번하게 신라를 침입했다. 한 예로 <삼국사기> 제3권 신라본기 실성이사금 때의 기록을 보자. ① 4년(405) 여름 4월, 왜의 병사들이 명활성을 공격해 왔다. 그들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자, 임금이 기병을 이끌고 독산의 남쪽 길목에서 요격하여 그들을 깨뜨리고 300여명을 죽였다, ② 6년(407) 봄 3월, 왜인이 동쪽 변경에 침입하였다. 여름 6월, 왜인이 또 남쪽 변경에 침입하여 100명을 사로잡아 갔다, ③ 8월, 왜인과 풍도(風島,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오도리 앞바다에 있는 오도(烏島))에서 싸워 이겼다. <삼국사기>를 보면, 실성이사금 앞의 흘해이사금 때도 왜구의 침입은 계속 있었다. 흘해이사금 37년(346년)에 왜군이 갑자기 풍도에 침입하여 변방의 민가를 약탈하고, 경주를 포위했으나 식량이 떨어질 때를 기다렸다가 퇴각하려 하는 왜구를 기병으로 공격해 격파했다.
빈번한 왜구의 침입에 시달리던 신라는 왜구 방비를 목적으로 지세가 험한 곳에 관문성을 쌓고, 관문성으로 오는 길목에 전초기지로서 작은 산성들을 쌓았다. 이와 같은 사실들에 비추어 보면 울산지역 산성들의 최초 축조 시기는 대략 6세기로 판단된다. <삼국사기> 3권 실성왕 7년(408년)의 기록을 보자. ‘7년(서기 408) 봄 2월, 임금은 왜인이 대마도에 군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두고는 우리를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서, 일이 터지기 전에 먼저 정예 병사를 뽑아 적의 군영을 격파하고자 하였다. 서불한 미사품이 말하기를, “저는 무기는 흉한 도구이고 전쟁은 위험한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서 다른 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만에 하나 이기지 못하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니, 지세가 험한 곳에 관문을 만들고 적들이 오면 막아, 그들이 침입하여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다가 유리한 시기가 되면 나가서 그들을 사로잡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남은 끌어당기고 남에게 끌려다니지는 않는 것이니 가장 상책이다”라고 하니 임금이 그 말에 따랐다.’
위의 기록은 울산 범서에서부터 동쪽으로 산 능선을 따라 경주 외동까지 쌓은 관문성과 동해안을 따라서 주요한 길목마다 있는 산성들이 이 시기에 왜구 방비를 목적으로 하여 축성된 것임을 알려준다. 이러한 성격을 지닌 대표적인 산성이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면에 있는 화산리 산성이다.
화산리 산성은 야트막한 산의 정상(해발 48m)에 축조된 포곡식 산성이다. 서쪽으로 대덕산(해발 152m)에서 시작된 낮은 야산들이 크고 작은 계곡을 만들면서 해안선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대정리, 원산리, 방도리 등 산기슭의 해안평야가 펼쳐져 있다. 화산리 산성은 평야의 마지막 구석진 곳에 자리하여 해안에서는 찾기 어려운 지형이지만 반대로 성에서 해안선을 관망하기는 매우 좋은 위치이다. 성의 전체 길이는 450m, 체성부 폭은 520㎝, 잔존 높이는 250㎝ 정도이다. 체성은 대부분 야산의 산 능선부를 내벽으로 삼고 5.2m 정도를 성 폭으로 삼아 축조하였는데, 서너 번의 개·수축 흔적이 있다.
이 성은 정문인 남문 하나만을 계곡부의 서쪽 끝단에 배치하였다. 남아있는 초석으로 미루어 남문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목조건물로 추정된다. 초석은 기둥 사이의 거리가 정면 3.8m, 측면 각각 1.9m 크기의 정방형에 가까우며 주변에 산재한 기왓조각으로 미루어 보아 건물에 기와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초석에 맞물려서 좌우 체성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지붕은 맞배형 또는 누층 건물일 가능성이 있다. 이 성은 3~4차에 걸친 보수작업으로 성 폭이 변하였으므로 그 흔적으로 보아서는 거의 마지막 보수단계에 현재의 남문 초석이 놓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 밖의 구조로서는 성 안팎에 축성 때 흙을 채취한 구상유구가 해자처럼 남아있다. 그리고 동벽과 북벽 및 남문 동쪽에서 각각 배수시설이 일부 확인되었는데 남문 쪽의 것은 인공적으로 고랑을 파고 그 속에 자갈을 채운 형태의 것이나, 동벽과 북벽의 출수구(出水口)는 인공적이라고 할 수 없고 어느 시기에 장기간 물이 고였다가 빠져나간 것이 아닌가 싶다.
화산리산성에 관해서는 이 성의 축성 시기와 관련하여 주목하여야 할 것은, 남해안에 위치하면서 특히 신라의 해상 관문로였던 울산항의 입구에 위치한다는 점, 성의 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토기 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양식에 해당하는 것이 삼국시대 신라 토기라는 점, 인접한 화산리 고분군이 성에는 분포하지 않고 그 밖의 주변 지역에만 고분이 밀집 분포하고 있는 점 등이다.
즉 6세기 이후에 축조된 신라 고분이 성내에는 없고 주위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는 점은 고분 축조 당시 이 성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연못이나 체성 아래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이곳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점 역시 고분의 축조 당시에 이 성이 이곳에 위치하였음을 증명하여 주는 자료라고 생각된다. 이 성이 주로 사용된 시기는 성내에서 출토된 유물로 보아 고려시대이며 조선시대에는 폐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화산리 산성지는 1980년대 말 온산국가산업단지 확장 사업으로 공단이 조성되면서 아쉽게도 흔적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따라서 구조와 특성에 관해서는 동아대학교 박물관의 보고서(1990)의 내용을 많이 참조했다.
송철호 한국지역문화연구원장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