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석유화학산업, ‘강 건너 불구경’ 아니다
지금 글로벌 석유화학산업은 전례 없는 위기 상황이다. 우리나라 석유화학산업도 직격탄을 맞고 악전고투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두 가지 사례만 봐도 일견 이해가 간다. 2023년 한국의 석유화학 설비는 2010년과 대비해 70% 늘었다. 하지만 같은 기간 일본은 15%, 서유럽은 9%의 석유화학 설비를 줄인 것과 정반대 행보를 걸었다. 더구나 유럽은 바이오와 특수가스에, 일본은 전자소재 등 고부가가치 제품(스페셜티)에 집중한 반면, 한국은 나프타분해설비(NCC)로 대표되는 범용 제품 생산에 집중했다.
지난 2012~2015년에 겪은 석유화학업계 위기는 수요부진 및 고유가에 의한 경기변동형 불황이었던 반면, 현재의 위기는 공급과잉에 따른 구조적 불황이다. 이 공급과잉은 세계적인 설비 증설 추세에서 비롯됐다. 중국은 석유화학 자급을 목표로 2018년부터 대규모 증설에 들어가 2022년에는 글로벌 최대 생산국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의 저가 범용 제품 밀어내기는 이미 현실화됐을 뿐 아니라 기술 자립도 역시 굉장히 높아진 만큼, 전방위적인 중국발(發)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결국, ‘스페셜티를 중심으로 석유화학산업 재편을 얼마나 빨리 완성하느냐?’가 경쟁력 제고 방향의 한 축이 될 것이다.
또한, 그동안 ‘주머니 속 칼’ 정도로만 여겨졌던 중동은 투자 금액만 무려 123조원에 달하는 8개의 정유·석유화학 통합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원유를 뽑아낸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만큼, 원유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국내 업체들이 원가 경쟁력 측면에서 이길 재간이 없다. 석유화학은 원료비가 핵심 경쟁력인데, 중동은 탈석유 시대를 대비해 원유의 안정적 소비처로서 석유화학 투자를 확대하면서 정유에 이어 석유화학도 경쟁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문제는 2028년에는 글로벌 공급과잉이 6100만t까지 더욱 커질 것이므로, 우리나라는 경쟁력 확보를 위한 ‘공급과잉 NCC 설비의 합리화’가 더욱 시급하다.
울산은 뒷짐만 지고 바라볼 때가 아니다. 작년 말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을 발표한 바 있다. 울산과 비슷한 규모의 석유화학단지가 있는 여수는 벌써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 지정을 위해 시와 지역 국회의원, 시의회가 혼연일체가 되어 공격적으로 나섰다. 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되면, 석유화학산업과 연관된 협력업체들에게 고용유지지원금이 지급된다. 또한, 산업재편을 이행하는 기업들은 금융채무 상환 또는 투자 재원 확보 목적으로 자산을 매각할 때 과세이연 기간이 연장되는 혜택도 받는다. 이에 울산도 석유화학업계를 중심으로 관련 대책회의를 열고 적극 대응해야 한다.
이외에도 정부가 내놓은 정책으론 공업 원료용 액화천연가스(LNG)에 대한 석유수입부과금 환급 등이 있다. 올 상반기까지 석유화학산업 투자 로드맵을 수립하고, 고부가 소재기술과 탄소감축 핵심기술, 글로벌 환경규제 대응기술 등 3대 분야 연구개발(R&D)을 확대하겠다는 발표도 잘 대비하여 절대 실기(失機)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근본적으로 범용 제품 과잉공급이 끝나지 않으면, 석유화학업계의 악순환 고리는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과거에도 석유화학은 규칙적으로 상승과 하락 사이클을 탔지만, 이번에는 쉽게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업계 목소리를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 결국, 구조조정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대규모 장치산업의 특성상, 기업 스스로 특정 사업을 떼어 매각하거나 사업부나 공장 단위로 매각하는 것이 녹록지 않다. 이미 시장 자율의 구조조정은 불가능한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이다. 그래서 정부가 주도하는 강력한 구조조정이야말로 확실한 경쟁력 제고 방향의 중심축이 될 것이다.
이동구 한국화학연구원 명예연구원 디지털혁신 U포럼 위원장 RUPI사업단장·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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